백승종의 '역사칼럼'

설 명절이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올립니다.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이지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귤산 이유원 공이 계십니다. 이공이 제 6대조 풍암선생(교관 공, 휘 백동량)을 위해 쓴 만사가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글씨는 제 5대조 이은거사(휘 백 추진)께서 옮겨 적으신 것입니다(사진 참조). 만사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원문에 더하여 재주 없는 제가 우리 말로 거칠게 번역하였습니다.

世世流芳孝事親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해 대대로 이름이 아름다웠네.

果然南土見斯人 정녕 남쪽 땅에서 이 분을 뵈올 수 있었다오.

如君不負名家後 명가 후예의 전통을 고이 지키신 그대.

愧我無爲刺史旬 하릴없이 자사(전라감사)로 빈둥거린 나를 부끄럽게 하셨네.

篤行尋常傳二子 돈독한 행실은 예사로이 두 아드님에게 물려 주셨구려

塵緣七十有三春 티끌 세상살이 일흔 하고도 삼년이었소

白楊枝外寒絲雨 백양나무 가지에 내리는 보슬비도 차가워

聊寄一歌意更新 한 가락 노래를 보내오자니 옛 추억도 새롭구려

慶州后人 李裕元 參判 橘山居士 경주후인 이유원 (이조) 참판, 귤산거사

참고로 이유원(1814-1888) 공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공은 조선후기의 명인으로, 호는 귤산(橘山)ㆍ묵농(墨農), 시호는 문충(文忠)이시지요. 1841년(헌종 7) 문과에 급제한 뒤로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습니다.

1882년(고종 19)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에서 선후조약 6관(善後條約六款)ㆍ수호조규속약 2관(修好條規續約二款)을 조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유원 공은 박학(博學)으로 유명하였고, 예서(匠書)에도 뛰어나 연경(燕京)에 갔을 때 청나라 조정 대신들도 이를 호평하였다고 합니다. 저서로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이 있는데, <임하필기>는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과 같은 유의 책입니다.

이유원 공의 아들과 조카들은 조선이 망하자,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2만석에 이르는 가산을 조용히 처분하여 만주로 집을 옮기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가히 조상의 뜻을 잃지 않는 본보기라 할만합니다.

이유원 공은 1851년(철종 2) 전라감사로 재직할 때 저희 집을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만사에도 보이듯 이 공은 저희 교관 공 할아버지, 곧 제 6대조 풍암선생을 직접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이 공은 제 5대조 이은거사 형제분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셨습니다. 이 공께서는 저의 집안의 전통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이은 선생이 전주 석양동에 부친이신 풍암선생의 묘소를 정하고 산 아래 서당을 짓자, <석양동 백씨 서당기>를 지어 축하하셨습니다.

이공이 쓰신 기문은 공의 저서 <<귤산문고>>에 수록되어 후세에 전합니다. <<귤산문고>>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지요. 훌륭한 조상의 뜻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저 자신의 부족함을 새삼스레 통탄하며, 명절 아침에 삼가 옷깃을 여밉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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