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떠나기 전날 밤이면 항상 짐을 꾸리는 것이 길손의 숙명입니다. 그곳에 가서 펼쳐 보아야 될 책 몇 권과 참 펜 몇 자루와 메모 수첩, 그리고 슬라이드 필름 몇 통 그다음에야 옷가지를 챙겼습니다.

이제 오랜 시간이 흘러 굳이 떠난다는 생각보다 잠시 나갔다 돌아오는 듯한 가벼운 마음이 나를 지배하지만 그래도 행여 떠나고 난 뒤에 내 흔적들이 나 아닌 타인에게 거슬릴세라 이리 치우고 저리 정돈하는, 아직도 연연함이 가시지 않은 내 마음이여, 김시습의 문집 <매월당 집> 4권 부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송돈학 경원(慶元)이 스스로 맹세하는 시를 지었는데, 

“살아서는 산속 사람이 되고, 죽어서도 산속 귀신이 되려네.“ 

이 시를 김시습이 보고 감격하여 서로 붙들고 소리쳐 울었다고 한다.‘

송경원의 시처럼 나가서는 산이건 강이건 그곳에 온 정신을 풀어놓고, 들어와서는 내가 거처하는 집에 온 정신을 풀어놓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가끔씩 나가서도 미쳐 못다 한 일에 마음을 졸이고 , 들어와서는 못다 보고 온 산천을 그리워하는 그래서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는 것이 오랜 습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세상의 작은 일들에도 흔들리고 흔들리는 그 마음이 정녕 제대로 평온해질 날은 과연 그 언제쯤일까요? 바람은 불어도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는데.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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