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조선시대에 역모를 꾀했던 역적(逆賊)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역적들은 대개 육지형(六枝刑)을 당해서 육신(肉身)이 여섯 갈래로 갈래갈래 찢긴 채 팔도(八道)에 전시되었다가 버려지기 마련이었다.
그 육시 시체 가운데 머리 부분은 기호(畿湖), 왼팔은 경상도, 이같이 분담되어 큰 시장을 중심으로 전시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성삼문의 묘가 논산에 있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런데 그 육지시를 끌고 다니는 망나니들은 그 흉물을 끌고 부잣집이나 큰 가게에 들어가 강제로 돈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 역적의 왼쪽 다리는 항상 함경도의 몫이었다. 전시가 끝나면 버리게 된 곳이 함경도 단천군 광천면 용금리의 매골마루였다.
조선 초기에 수복된 북관지방(함경북도)를 제외하면 이곳이 우리나라 최북단이었으므로 조선 5백 년 동안 역적의 왼발은 내내 이곳에 버려졌다.
주모자들의 처자들은 대부분 노비로 전락했다. 그들을 인조천민(人造賤民)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추석이나 한식날을 전후해 기나긴 성묘(省墓) 나그넷길에 올랐다.
그런 연유로 육지형을 당해서 무덤을 갖지 못한 역신의 후손들은 이 메골마루를 향해 기나긴 순례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추석이나 한식을 전후해선 이들 후손들의 곡성이 이 메골마루 일대를 진동시켰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가문에서는 후손 한 사람을 이곳 메골마루에 상주시켜 제사를 지내게도 하였고, 재력이 있는 후손들은 이곳에 제사 답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게도 하였다.
그보다 더 슬픈 사연을 지닌 사람의 묘가 있는 곳이 논산시 가야곡면의 쌍계사 부근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묘와,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세상을 열려다가 실패한 사상가인 김옥균에 묘가 있는 호미곶이다.
성삼문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과 노량진에서 거열형을 당한 뒤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매장되었다. 그때 다리 하나를 이곳에 묻어서 일지총(一肢塚)이라고 부른다.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해 미국 조계지인 철마로(鐵馬路)에 있는 동화양행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비운의 죽임을 당한 김옥균이 청나라 군함인 위원호(威遠號)에 실려 양화진에 도착했다.
4월 14일 양화진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은 뒤 그 머리와 사지가 옥문에 매달렸다가 장기곶 앞바다에 시체 중 팔 한 토막이 내던져진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한창이던 1894년 갑오년 5월이었다. 그의 팔을 이곳에 버린 이유는 동해에서 튀어나온 이곳의 지형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말의 풍운아이자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의 팔은 포항시 회목에 던져져 지금도 푸른 동해의 파도 아래에 잠들고 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에서
역사는 이렇듯 가슴 아픈 사연들을 세월 속에 묻고 또 묻으면서 이어져 왔다. 너 죽고 나살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더불어 사는 그러한 세상은 요원한가?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