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향에 있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비보를 듣고서는 밤새워 아들이 저승길에 입고 갈 명주 수의를 손수 마련했다. 어머니는 그 수의와 함께 한 통의 편지를 뤼순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편지는 “장한 아들 보아라”로 시작되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대의를 위한 것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없이 슬퍼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진정한 우국지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격절한 말씀이었다.

“아마도 이 편지가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일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애끓는 슬픔을 억눌렀다. 어머니는 그 “장한 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죽음마저 무색하게 하는 강단으로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처럼 의로운 아들도 있었을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아들은 어머니가 눈물로 지으신 수의를 입고 저승길을 떠났다. 32세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을 때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백범 김구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청년 시절 백범은 안중근의 부친에게 신세 진 적이 있었다. 백범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조마리아 여사는 상하이에서도 애국지사들이 존경하는 어머니였다.

2008년 8월, 한국 정부는 뒤늦게나마 여사의 영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바쳐 후손의 도리를 실천했다.

※출처: 백승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사족: 안중근 의사 같은 큰 인물의 뒤에는 훌륭한 부모님이 계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특히 서릿발보다 의로운 어머니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독서를 통해 교양과 품위를 쌓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계셨기에 안중근 의사 같은 큰 인물이 길러졌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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