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 유대인의 애환이 서린 독일 남서부의 미래도시

친구 울리히는 나를 프라이부르크 구도심에 있는 시나고그 광장으로 데려갔다. 과거의 유대인 거주 지역이 있던 곳이다. 1230년부터 베버 가세, 즉 “베짜는 사람들의 거리”라고 불린 그 골목에 그들의 작은 공동체가 들어섰다. 1338년 10월 12일, 도시의 통치는 유대인들에게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증명서를 발행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안전은 곧 위험에 처했다. 1349년 1월 1일자로 안전증명서가 효력을 잃었다. 1401년 시의회는 이 도시에서 유대인을 하나도 남김없이 추방했다. 이후 400년 이상 유대인은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1809년부터 유대인들에게 다시 영주권이 발급되었다. 곧 유대인 공동체가 재건되었다(1836년).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시나고그, 곧 유대인 공회당이 완공되었다. 유대인들은 상인으로서, 또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은 급변했다. 1938년 11월 9일, 이른바 ‘수정의 밤’이 되자 공회당은 불태워졌다. 나치는 유대인이 소유한 모든 가게와 주택을 무참히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 도시의 성문인 ‘마르틴의 문’이 떠오른다. 1940년 10월 22일, 나치의 추종자였던 로베르트 하인리히 바그너가 독일 서남부지역의 유대인 이송 명령을 내렸다. 그때 이 도시에서도 350명의 유대인이 남프랑스로 옮겨져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그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사망했다. 1942년 7월 18일, 이 도시에서 잔명을 유지하고 있던 소수의 유대인들이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본래 공회당이 있던 자리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예전에 유대인이 살던 곳에는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청동 판을 부착해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슬픔의 흔적이 길가에 낭자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
독일인은 가해자이자 또한 피해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도시는 심한 폭격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그 시작은 일종의 자폭이었다. 1940년 5월, 독일공군이 실수로 60개의 폭탄을 떨어뜨린 바람에 57명의 시민이 죽었다. 그러나 1944년 11월 27일에는 연합군의 폭격이 있었다. 무려 300대의 폭격기가 이 도시를 집중 공격했다. 도심지는 몽땅 파괴되었다. 예외라고는 뮌스터뿐이었다.
한데 독일인들은 지독한 구석이 있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 도시를 복구했다. 그것도 폭격을 당하기 직전의 모습, 즉 중세 식 도시로 말끔하게 재건하였다. 뭐든 새 것을 좋아하는 우리와는 딴판이었다.
1945년 4월 21일, 프랑스 육군이 이 도시를 접수했다. 프랑스 군대는 독일연방 공화국이 출범한 뒤에도 그대로 눌러 앉았다. 몇 차례 독일의 습격을 받았던지라, 그들로서는 독일의 평화 의지를 여간해서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독일이 재통일 되고 나서야 프랑스는 물러났다. 1991년 프랑스 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자 수 년 뒤 프랑스 군대의 병영 자리에서 5,000명의 시민들이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이른바 보봉 포럼이었다. 시민들은 “지속 가능한 모범지구”를 건설하기로 약속했다.
녹색의 생태도시로 거듭나
그때 이후 프라이부르크는 “생태도시”로 자라났다. 이곳에는 연방이 운영하는 방사선보호청도 있고, 여러 태양광 산업체와 관련 연구소가 터를 잡고 있다.
1995년 6월, 시의회는 특별한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시유지에는 반드시 “저에너지 건물”만 짓기로 결의한 것이다. 저에너지 주택이란 태양광 발전시설을 지붕에 설치한 것으로, 해당 가정에 전기와 온수도 제공하였다. 또, 태양열을 이용해 실내 온도도 조절하였다.
생태적 사고가 심화되자 시내에서는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모두 보행자 구역이 된 것인데, 대다수 시민들은 자전거를 대체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시 당국이 운영하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완비되어 시민들의 불편은 더욱 줄었다.
이 도시는 정치색이 독특하다. 일찌감치 녹색당의 본거지가 되었다. 독일의 주요 도시 중에서 녹색당의 입김이 가장 강한 곳이다. 그 득표율이 35퍼센트까지 올라갔다. 2012년 총선 때 이 도시의 일부 투표구서는 녹색당이 40퍼센트 이상 득표하였다.
2018년 5월의 지방선거에서는 이변이 나타났다. 무소속 후보인 마르틴 호른이 시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사민당과 지민당의 지지를 받아 녹색당을 젖히고 선거에 승리했다. 그런데 아직도 시내 곳곳에서 녹색당의 입김이 강하게 느껴진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사족 한 마디: 어제(2021. 1.27)가 마침 홀로코스트 기념일이죠.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이죠, 정확히 말해서는.
1945년 1월 27일에 연합군의 일원인 소련군이 나치가 만든 최악의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접수해서 드디어 자유를 되찾아주었으니까요. 그러나 역사적 기억이란 쉽게 소멸되기 마련이어서, 근년에는 유럽 각국에서 다시 반(反) 유대주의 정서가 심해지고 있어요. 인간의 편견과 차별은 평화와 정의의 적입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