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16세기 후반 조선의 한 여성이 남편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단순히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부부 사이의 애정 문제를 토로한 것이었다. 남편은 고향집을 떠나 몇 달간 서울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는 고향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그동안 자신이 아내와 처가를 위해 많은 노고를 했다고 자화자찬한 모양이다. 그러고는 자신이 이제 첩살림을 하고 싶으니 양해하라고 윽박질렀다.

고향의 아내는 발끈했다. 그녀는 성현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까지 남편의 덕이 부족함을 따끔하게 질책했다. 아내가 보기에 첩살림이란 당치 않은 일이었다. 편지에는 작자인 상류층 여성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편지의 수령인인 성리학자의 내면세계와 당시 조선 사회의 분위기 또는 관습을 엿볼 수 있는 단서도 발견된다.

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그대가 제게 얼마나 관대한 척하시는지를 짐작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군자(君子)는 항상 스스로 법도에 맞게 행동하며, 사소한 감정까지 온전히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현께서 가르치신 바일 것입니다.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한 사나이가 자신의 아내나 아이들을 위하여 실천에 옮기는 하찮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탐욕스럽고 잡된 생각이 전혀 없이 마음이 지극히 맑다면, 이미 군자가 될 바른길을 걷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데도 그대는 어찌하여 꽉 막힌 규문(閨門) 뒤에 웅크리고 있는 아내에게 그대가 관대하게 대해줬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그저 서너 달 동안 첩실을 아니 두고 홀로 지내셨다 하여, 마치 그 덕이 넘치는 것처럼 자부하며 그렇게 뻐기시는 건가요? 그대는 정말로 나의 호감을 크게 살 만한 일을 하셨다고 믿는 건가요?

송덕봉이라는 선비

이 편지의 주인공은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이다. 덕봉은 그녀의 호다. 두말할 나위 없이, 조선 여성이 호를 가지는 경우도 드문 일이었다. 편지가 발송된 것은 1570년(선조 3) 음력 6월, 송덕봉의 나이 이미 50세였다. 당시 그녀는 전라도 담양에 있는 본가를 지키고 있었고, 배우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문제의 편지는 한문으로 쓰였는데, 조선시대에 여성이 쓴 한문편지는 드문 편이다. 한문으로 편지까지 쓸 정도가 되려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했으나, 여성에게 교육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적은 없었다. 송덕봉은 한문에 매우 능숙했다.

그녀는 일상의 감정과 체험을 자유자재로 한문에 담았다. 그러나 독자적인 문집을 만들지는 못한 것 같다. 배우자 유희춘은 이 점을 안타까이 여겨 그녀의 시를 묶어 한 권의 시집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덕봉의 시집은 간행되지 못했고, 시문 몇 편이 문제의 한문편지와 함께 『미암일기초』 5책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녀의 한시는 『미암일기』에 더러 산견되기도 한다.

당대의 명사 허성(許筬)은 스승인 유희춘의 생애와 업적을 요약한 「묘갈명」에서 송덕봉의 삶에 대해서도 몇 마디 적어놓았다. 예를 들면 “부인은 영특해 특히 경학과 역사 공부를 많이 하셨다. 그런 점에서 부인은 ‘여성 선비(女士)’라고 해야 마땅하다”라고 그녀의 재능을 기렸다.

송덕봉은 평소 책을 즐겨 읽고 배웠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녀의 가계 기록을 살펴보면, 1521년(중종 16) 12월 20일 전라도 담양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운 사실이 확인된다. 송덕봉의 아버지 송준(宋駿)은 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성중(成仲)’이란 자(字)까지 지어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름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보통 관례를 치른 후에 이름 대신 자를 썼다. 자는 남성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으나 송준은 딸에게 예외를 허락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 유희춘의 자는 인중(仁仲)이었다. 아마도 송준은 딸 내외가 형제처럼 사이좋게 의지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딸에게 성중이란 자를 준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송덕봉의 결혼생활

송덕봉이 유희춘과 결혼한 것은 1536년(중종 31), 송덕봉의 나이 16세였다. 유희춘은 24세로 이미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유희춘의 첫째 부인은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송덕봉은 자연히 재취가 된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상류층은 대체로 14~20세에 결혼을 했고, 배우자를 사별한 남성은 재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결혼이란 집안 어른들이 숙고를 거듭해 마련한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당사자들의 애정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양가가 여러 가지 세속적인 가치들을 고려해 결정했다. 즉 결혼은 부의 향유와 신분의 상승, 가문의 사회적 위상 제고를 위한 상호 간의 연대를 의미했다.

유희춘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부유하고 문벌(門閥)까지 갖춘 송씨 집안을 좋은 결혼 상대로 여겼다. 송덕봉의 아버지 송준의 입장에서는 사윗감 유희춘이 약관에 이미 소과에 합격했으므로, 장차 상당한 지위와 명성을 얻을 것으로 보고 이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유희춘은 이미 약관에 문명을 날렸으며, 20세에는 벌써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1538년(중종 33)이었다. 송덕봉과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유희춘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유희춘의 승승장구는 10년도 못 가서 막을 내렸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된 유희춘은 귀양길에 올랐다. 결국 그는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집안에서는 유희춘의 부재가 장기화되었다. 송덕봉의 어깨가 무거워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는 친정에서 상속받은 노비와 전답을 잘 경영하여 시어른을 봉양하고 자녀를 키웠으며 유희춘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다가 귀양간 지 19년째 되던 1565년(명종 20) 겨울, 드디어 시련이 끝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왕 명종은 유희춘을 충청도 은진으로 이배(移配)하라고 명령했다. 2년 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했다. 나이 어린 왕은 유희춘을 비롯해 명종 때 박해받은 신하들을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정국을 일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희춘 역시 20년에 걸친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조정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유교 경전과 고전에 두루 능통하다는 정평이 나 있어, 1567년(선조 즉위) 겨울에 홍문관의 중견관리가 되었다. 경연에 참석해 날마다 고전을 해석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유희춘이 귀양에서 풀릴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한 1565년 가을, 송덕봉은 함경도 종성으로 남편을 찾아간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45세였다. 그 뒤 은진으로 귀양지가 바뀌자 유희춘을 따라 줄곧 함께 지냈다. 그러나 유희춘이 벼슬을 얻어 서울로 올라간 뒤에는 담양에 있는 본가로 되돌아갔다. 1567년(선조 즉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남편만 서울로 가고 

송덕봉과 유희춘 부부는 서로 떨어져 지낼 때가 많았다. 함께 산 기간은 전체 결혼생활 가운데 절반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유희춘의 학업과 벼슬과 유배생활 때문에 별거 아닌 별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에도 송덕봉이 남편을 따라 선뜻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 까닭은, 유희춘의 벼슬길이 장차 어떻게 될지 전망하기 어려웠던 점도 한 가지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관직에 등용된 지 불과 1~2년 만에 해임되는 경우가 많았다. 임용된 지 수 개월 또는 단 며칠 만에 파직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귀양에서 풀린 유희춘이 서울에서 좋은 벼슬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송덕봉은 남편의 서울 생활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하물며 유희춘은 이미 청년 시절에 짧은 영광 끝에 정치적 좌절을 맛본 사람이었다. 송덕봉이 홀로 담양 본가에 머문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유희춘 역시 홀로 서울에 머물렀다. 이 말은 그가 아직 이른바 경첩(京妾)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가 거주한 서울 집에는 세 명의 남자 종과 두 명의 여자 종이 있어 일상의 수고를 덜었다. 하지만 아내도 첩도 없이 지내는 서울 생활은 무료하고 외롭고 고단했던 것 같다. 그의 나이 이미 60에 가까워 노인 대접을 받는 처지였지만, 홀로 지내는 것이 편치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와 선물 

객지에 머물던 상류층 출신의 남성은 집안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알리곤 했다. 장기간 타향에 머물게 되면, 고향 집으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유희춘 역시 서울에 머무는 동안 아내 및 가까운 친척에게 한 달에도 두세 번이나 편지를 보냈다. 유배지에서 오는 편지에는 필요한 의복을 보내라는 요구가 있었고, 오래 두고 먹을 음식을 보내라든가, 고향 집에서 가져다 쓸 물건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때로는 객지에서 식구들에 게 보내주고 싶은 물품에 관해 쓰기도 했다.

더러는 객지에서 값비싼 물건을 구해 집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시장이 발달하고 있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체 높은 양반이 직접 옷을 사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은 가족이 손수 바느질해 곱게 지은 옷을 가져다 입었고, 고향 집에서 정성껏 만들어서 보낸 밑반찬을 받아 먹는 것을당연시했다.

조금 일반화해서 말하면, 편지를 따라 그것을 보내는 사람의 마음과 물건도 이동했다. 편지 심부름은 주로 집안의 충직한 종이 도맡았다. 남종과 여종들이 상전의 마음이 담긴 편지와 물건을 가지고 먼 길을 바삐 오갔다. 송덕봉과 유희춘이 부리는 남녀 종들도 편지와 선물을 이고 지고 또는 말 등에 싣고 서울과 담양을 왕복했다. 상류층 사람들의 정서적・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종들은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첩을 들이는 이유 

만일 필요한 물품을 고향 집에서 조달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경우에는 현지 첩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첩은 무엇보다도 타향에 머무는 남성의 의식주를 편리하게 해결해주는 존재였다. 첩은 남성의 생리적 요구를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에도 기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첩에 관한 논의는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상류층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첩이란 단순히 성적 유희의 대상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첩은 객지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기도 했다. 한때는 송덕봉과 유희춘 부부도 그러한 인식을 암암리에 공유했다.

1547년(명종 2) 유희춘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의 일이다. 송덕봉은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처분해가며 남편을 따라갈 첩을 마련해주었다.

그녀는 생면부지의 외로운 변방 유배지에서 남편이 겪을 외로움과 불편함을 염려해, 자신의 역할을 대리할 첩을 뽑아 노자를 주어 보냈다. 직접 남편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시집의 형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본가에는 연로한 시어머니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 시모(媤母)를 봉양하기 위해 본가를 비울 수 없었다.

달리 말해, 조선 왕조의 국시인 성리학의 가족 규범 때문에 송덕봉은 개인적인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고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며느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송덕봉이 유교이념과 제도 아래 무참히 꺾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유교의 이론을 빌려, 경첩을 두고자 하는 남편의 의지를 꺾었다. 그녀는 유교적 덕행을 쌓음으로써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가사 경영권을 확고히 장악했다. 물론 지배 이데올

로기와 제도적 한계 안에서의 일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 16세기 조선 여성이 처했던 구체적인 삶의 조건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백승종, <선비와 함께 춤을>, 사우, 2018.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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