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왕자유(王子猷)가 산음에 머무를 때 하루는 눈이 내렸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고 술을 가져오라고 하며 온통 하얗게 변한 야경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배회를 하며 <좌사>의 초은시를 읽다가 문득 대안도를 생각했다. 

그때 대안도는 섬에 있었는데, 곧장 밤에 작은 배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밤을 꼬박 새워 비로소 도달했지만 문 앞에 도착하고서는 들어가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왕자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애초에 내가 흥이 나서 떠난 것이고, 또 흥이 가셔서 돌아온 것입니다. 꼭 내가 대안도를 봐야 할 까닭이 있소?"

<세설신어>에 실린 글이다.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가셔서 돌아왔다. 마음이 가면 몸도 따라가고, 그곳까지 그리운 마음 품고 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누구나 신년 초에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한해의 마지막 무렵 생각해보면 계획대로 진행된 것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도 매년 초만 되면 오랜 관행으로 한 해를 설계한다.

내일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고, 내일은 어떤 책을 읽고서 어떤 글을 쓰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이 다 울긋불긋한 계획, 얼마나 보기 좋은지?

내가 나와 하는 부질없는 계획. 아서라, 세상사 뜬구름 같은 것, 계획하지 말아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그리고 저물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보들레르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만약 네가 날마다 일을 한다면, 삶은 더욱 견딜만한 것이 되리라. 날마다 네 과업을 하고 내일에 관해서는 신에 맡길 것 두 눈 딱 감고 목적 없이 미친 사람처럼 일할 것,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그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그저 살다가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면서도 또다시 세우는 계획, 그게 바로 인생이다. 

그래도 부질없이 계획을 세운다. 유월에는 지난해 가지 못했던 스위스 몽블랑을 가고 또, 또, 또, 중국도, 이집트도, 그리고 이 산하를 마음껏 떠돌아야겠다는 생각,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도 그러하기를.

/사진ㆍ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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