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칭이라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내가 상대방을 뭐라고 부르는 것도 상대방이 내게 부르는 것도 그것도 서로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어려운 사이일수록 부르는 호칭도 어색하지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김지하 선생님이 나에게 신형이라고 스스럼없이 불렀을 때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내가 느꼈던 당혹감 그것을 작고한〈사람과 산〉의 홍석하 사장님에게 똑같이 들으면서 형이란 말이 나이를 떠나 서로 공경하는 의미로 쓸 수 있는 말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사람을 만나면 나이를 묻고, 출생지를 묻고, 학교를 묻다가 보면 위계질서가 생겨서 그때부터 자연스런 관계가 사라져 버리지요.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서로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까요.
〈예기〉에 “나이가 배(倍)가 많으면 아버지와 같이 섬기고, 열 살이 더 많으면 형과 같이 섬긴다”라는 부사․형사(父事兄事)라는 말이 있고, 〈예기〉의「곡례 상(曲禮上)」에는 “나보다 다섯 살이 더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되 약간 뒤에서 따라 간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호 이익(李瀷)은〈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십년 이상 차이가 나지 않고, 7년이나 8, 9년 정도 차이가 나면 모두 벗을 삼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열여섯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자기 나이가 그 중간에 있을 경우, 위․아래 모두 7년 차이가 나게 된다. 이때 아버지와 벗하면서 아들은 하대한다면, 아버지는 부끄러워하고 아들은 노여워할 것이다. 이처럼 나이만을 따져 벗한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삼봉 정도전이 목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 이곡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과 이색의 아버지가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익의 말은 계속됩니다.
“벗은 그 사람의 도를 벗하는 것이다. 노소를 막론하고, 예의를 바르게 하고 말을 공손하게 하여, 인(仁)을 북돋우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야 한다. 상대에게 함부로 하고 부질없이 장난질이나 하는 것은 벗의 도리가 아니다.
오늘날의 풍속에 ‘존장’, ‘시생’ 등의 칭호가 있는데, 이는 배행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오히려 근후한 풍속이 있었다. 어떤 이의 아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하다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게 될 경우, 그의 아버지가 나보다 나이가 적더라도 반드시 ‘존장’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은 이런 풍속도 점점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벗을 형제라고 일컫는데,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많아 형으로 섬겨야할 사람에 대해서, 오늘날 풍속에 ‘노형(老兄)’이라고 하여 구별한다. 그러나 이 예는 ‘존장’에 비해 조금 거만한 말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형으로 섬긴다’는 말은 자기의 형과 같이 그를 섬기는 것이니,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노형’이란 그가 노련하고 성숙하다는 말이지, 반드시 나보다 나이 많은 것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육상산(1139~1192)보다 아홉 살이나 더 많았지만 그를 ‘노형’이라고 불렀으니, 이런 데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나는 벗에게 편지할 때, 나이가 비슷할지라도 그를 ‘노형’이라 부르고, 나 자신은 ‘우제(友弟)’라고 한다.”
그대는 그대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칭호를 부르며 삶의 연륜을 더해가고 있는지요. 친밀하다는 이유로, 야, 또는 너라고 혹은 공경하는 마음도 없이 이름들을 부르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도 아무리 직위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노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될 날은 언제쯤일지요.
/사진ㆍ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