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ward Lee가 본 '한국 사회'
또다시 맞는 연말연시, 그 어느 때보다 착잡한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매년 이 맘 때면 늘 그렇듯이 인간이나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영혼을 나누며 고락을 함께할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예의, 곧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시 들추어 내 찬찬히 들여다보는 게지요.
언젠가 이미 한 말이지만 '나'라는 자아는 그다음에 있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것이 진정한 '나’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에게 쓰임이 되지 못하는 '나'는 우리 공동체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의 허물을 감싸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스스로 인식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비록 힘들고 아프며 외롭더라도.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영혼의 음성에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순복 하고자 할 때, 진정한 희망은 그런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속 사람으로부터 잉태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괴감 넘어 자포자기하는 심정
어제, 그제 사법부의 테러에 가까운 만행에 시민사회가 분노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이 거룩한 성탄 절기에 우리는 또다시 거악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괴감을 넘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토로합니다. 저도 똑같이 힘들고 지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자꾸만 시민사회에 요구하는 게.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할 때입니다. 정치인들이 세상을 바꿔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통해 제도를 바꾸고 혁신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민 집단지성이 더욱 확장되고 강고해져야 합니다.
시민사회에 미치지 못하는 당청정에 더 크게 분노하며 압박해야지요. 얼마나 힘들게 인내하며 견뎠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습니다. 바로 내 삶이자, 내 아이들의 미래이니까요.
역사적 대 전환기에 가장 위험한 지경
정치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너무 믿어선 안됩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문화와 상황이 있으니 늘 시민사회가 견제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주인이니까요. 매니저에게 일을 맡겨놓고 방관하면 그 사업장은 결코 번창할 수 없습니다. 주인과 직원은 마음부터가 다른 법이지요. 누가 목숨을 걸고 내 삶을 지켜줄까요? 그런 정치인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도 내 삶을 바꾸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함께 서야 합니다.
윤석열은 이제 더 포악하게 복수혈전을 펼치겠지요. 그렇게 기득권이 총공세로 보선과 대선지형을 무지막지하게 장악하려 들 것입니다. 역사적 대 전환기에 가장 위험한 지경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님께 고언 합니다.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일하시지만, 죄송하게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 천만 촛불시민이 생업을 물린 채 불의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세운 혁명 정권입니다. 혁명, 목숨을 거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정권에서 누구도 혁명적으로 목숨을 거는 '전사'는 없습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적폐 청산했어야
굳이 언급하자면, 조국과 추미애 정도이지요. 목숨을 걸어야 비로소 기득권을 혁파하고 '재조산하'를 이룰 수 있습니다. 피 흘리지 않는 개혁이나 혁명은 역사가 증거 하듯 없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명을 요구합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적폐를 청산했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배수진을 쳐야 합니다. 목숨을 건다면 무엇이 두려울까요? 이 땅은 여전히 비장한 결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의 원성이 가장 두려워야 지도자입니다. 국민이 포기하는 사회란 오직 절망뿐입니다. 그것이 저 악폐들이 원하는 항구적 식민사회, 개돼지로 만족하는 우민이지요.
그럼에도 당청정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으론 정말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민사회의 원성과 죽음 같은 한숨, 통곡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즉생의 각오로 나서면 시민사회가 함께할 것입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짜 전쟁을 치러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때입니다. 재조산하를 원한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의롭게 사는 길입니다. 이 거룩한 절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의미를 되새기며 충심으로 대통령께 고언 합니다.
/에드워드 리[Edward Lee, 재미(在美)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