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고종이 참 문제였어요! 그가 한반도에 외세를 끌어온 것이 아주 큰 문제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동학농민운동의 경과를 잠깐 살펴봅니다.

알다시피 갑오년의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보다 얼마 전, 그러니까 1893년 겨울로 잠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봉준은 뜻을 같이 하는 고을 사람들 수십 명과 함께 그 시절의 군수였던 조병갑에게 정치를 제대로 하라며 항의했습니다.

그 항의에 조병갑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어요. 으레 관리들은 백성의 요구를 묵살하는 법이니까요. 그러자 일이 커졌어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1000명의 고부 사람들과 함께 고부 관아로 몽둥이를 들고 찾아갑니다. 군수 조병갑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버렸어요. ‘군수가 줄행랑을 놓았으니까 대강 다 된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했던지 고부 백성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소식에 접한 조정에서는 과연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조사를 하게 되었어요. 장흥부사로 있던 이용태라는 관리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조사관으로 임명해서 현지로 파견했어요, 그 당시에는 안핵사라고 불렀어요. 이용태는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불렀든가 봅니다.

‘이제 내가 한 건 크게 할 때다.’ 이렇게 생각했던가 봐요. 이용태는 고부 사태에 참가했던 백성들의 명단을 빠짐없이 재구성하기라도 할 듯 조사에 열을 냈어요. ‘하나씩 몽땅 붙잡아 와. 이 버르장머리가 없는 농사꾼들 같으니,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고부 백성을 심하게 닦달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용태를 따라 장흥에서 올라온 군인들도 여기저기서 많은 행패를 부렸답니다. 고부 민심이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술렁거렸답니다.

1894년 3월 20일 전봉준이 다시 일어섰어요. 인근에 전라도 무장(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이 있는데, 그곳에는 손화중이라는 인기 높은 동학 접주 있었죠. 손화중은 학식도 있고 재산도 넉넉한데다 인품이 훌륭했던 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고 해요. 전봉준은 바로 무장으로 달려가서 ‘창의(倡義)’를 했어요.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반기를 든 것이었어요. 그때 무장에 모인 사람들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뽑았지요. 그때 동학농민군이 내걸었던 깃발이 바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어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한다는 뜻이었지요. 이게 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사람도 있을 법해요. 나라에 반기를 들면서 나라를 바로잡느니,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다느니, 말이 안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지요.

동학교도는 물론이고 일반 농민들로서는 생각이 달랐어요. ‘맞아. 지금 이것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거든. 우리가 뭔가 바꿔놓아야 돼.’ 많은 부조리를 없애야 나라의 위신이 서고 백성의 삶도 펴질 테니까요. 보국안민은 그래야 되는 것이 맞지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그때 서울로 직행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무리를 지어 호남 지방을 한 바퀴를 돌았어요. 먼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세를 크게 불려서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전라도의 중심지, 전라감사가 머무는 전주까지 치고 올라왔어요. 전주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한 것은 1894년 4월 27일이었어요.

그때 교통이라든가 통신시설의 미비 등을 고려할 때,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정말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던 것입니다. 한 달 만에 전라남·북도를 일주하면서 대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자, 조정은 초긴장 상태였어요. 전라도 전체를 대표하는 전주성, 조선 시대에는 한양 다음으로 물산이 풍부하다고 해도 좋을 거대도시 전주가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까요.

전라도는 전국에서 인구도 가장 많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넉넉한 지역이었어요. 농업이 지배적인 산업이었으니까요. 호남평야, 나주평야로 이름난 전라도에는 부자도 많고, 쌀과 보리의 생산량도 단연 많았어요.

조정의 조세수입이 전라도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지요. 그런 전라도가 감사를 비롯해 조정에서 파견한 50여 개 고을의 관리들까지 사실상 동학군의 포로가 되다시피 한 상황이었어요. 고종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지요.

고부라는 조그만 고을에서 사단이 일어난 것이 1월이었어요. 그러나 순식간에 문제가 확대되어서 3개월이 지난 4월 말에는 전라남도와 북도가 상당 부분 동학농민군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뜨겁게 호응했는지 상상이 되지요? 전라도 농민이 모두 호응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지요. 물론 조정에서는 서울의 정예부대를 진압군이라고 하여 내려 보냈지만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어요.

조정이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치고 올라갈 기세였어요. 고종은 겁을 냈어요. 관군으로는 이 사태를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왕을 괴롭혔어요. “호랑이 같은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올라오면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그때 여러분이 고종이었으면 어떻게 조치했겠습니까? 만약 제가 고종이었으면 단순하고 명백한 해결책이 있었다고 봐요. “당신이 왕 해라!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내게는 골치만 아팠지, 무엇을 해도 잘 안되더라. 마침 잘되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좋은 정치를 한번 해봐라.” 저 같으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 소견이지요.

고종은 권좌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굳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왕 자리를 지켜야 돼. 이건 내 나라야. 내 거란 말이야.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저 반란의 무리를 막을 강한 군대가 없다. 청나라에 부탁해야겠다.” 간단히 말해, 이런 식의 결론을 내렸어요.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지 500년이 되었으나, 외국에 군대를 요청해서 내부 문제를 풀려고 한 사람은 고종뿐이었어요.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도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해서 사태를 진정시켰어요. 그 바람에 오랫동안 청나라의 등쌀에 시달렸어요. 서울에 파견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왕처럼 굴었잖아요. 고종으로서는 참담한 일이었어요. 이처럼 쓰라린 경험이 있었는데도, 고종은 또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어요. 한심한 일이었어요.

19세기 중반부터 청나라는 자기네 나랏일을 한 가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요. 나라는 사실상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다시피 했어요. 그럼에도, 청나라의 지도층은 동아시아의 최강자라는 헛된 생각을 놓지 못했어요.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조선으로 군대를 급파했어요. 조선이 다른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기 전에 조선 일을 자기네가 처리해야 되겠다고, 그래야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당시 청나라가 자랑으로 여기던 부대는 나름으로 근대화된 북양함대였어요. 위안스카이도 바로 북양함대 출신이었지요. 그 주력부대는 물론 해군이었지요. 그런데 북양함대로 말하면, 중국의 최고 실력자 이홍장의 지휘아래 있었어요. 청나라에서는 훈련이 가장 잘 된 정예부대예요. 청나라는 북양함대의 일부를 보내, 고종을 위기에서 건지려고 했어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는 나라가 있었어요. 일본이었습니다. 1880년대 초부터 일본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어요.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착실한 준비를 하며 때를 기다렸어요. 그들의 눈에 든 가시가 있었는데, 그게 청나라였어요.

전통적으로 조선의 종주권(宗主權, 주인된 권리)을 행사해왔으니까 말이지요. 일본은 청나라를 물리적으로 꺾어야만 한국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그런데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보낸다고 하니, 일본도 이 기회에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서 문제를 일으키자는 속셈이었어요.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는 여러 해 전 중국의 톈진에서 조약(‘톈진조약’)을 맺었지요. 한 가지 특이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만약 자기네 가운데 한 나라가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면, 다른 나라에도 알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나라의 군대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예정된 일이었던 겁니다.

고종은 그 점을 반드시 고려했어야만 하는데요. 왕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만 했지, 일본이 국내에 들어와서 어떤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지는 생각할 겨를도 아마 없었던 모양이지요. 그런 무능한 왕이었어요. 한데도 최근에는 학계 일각에서 고종을 재조명한다며 호평을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어요. 이런 역사가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고종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종의 왕후였던 명성황후 역시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잊지 마아야지요. 그도 고종과 마찬가지로 문제투성이입니다.

명성황후가 고종과 달리 백성을 위해 특별한 공헌이라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맙시다. 그런데도 명성황후는 비극적 운명 때문인지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기만 하면 인기가 높아요. 오페라도 잘되고 그렇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백승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들녘, 2019)


사족: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으니까요. 권력이란 큰 책임을 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마음껏 호사와 방탕의 도구로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범상한 인물이 권좌에 올라가면 그런 사실을 잊고 도리어 패가망신의 길에 접어들어요.

망신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그와 같은 "바보"들이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내려오세요. 책임지기 싫으면 이제라도 그만 두기를 권고합니다.

제 말씀이 너무 엄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가 저마다 제 잇속을 차리기에 바쁜데요. 이렇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다니요.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된 건물이라도 그것을 떠받치는 기둥은 반드시 있습니다. 멋을 부리려고 기둥도 자르고 들보도 떼어내보세요. 그 집이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요.

혼탁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은 사물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겠습니다. 권력은 책임 지기 위해서 있는 물건입니다. 옛 말씀에 나오는 "공기(公器)"입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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