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학문이 세분화가 되다가 보니 자기가 전공한 학문을 넘어서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딘가 불편해야 하는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왜 그렇게 많은 것을 아느냐고?,“ 백화점 같다느니, 도서관 같다느니 하면서 여러 가지 아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럴 때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파지 않고 수많은 책들을 읽어 얻은 지식과 길에서 배운 나의 지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문자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가지를 깊게 파라‘ 그러다 보니 ‘벼룩의 간’이나, ‘모기의 심장’을 공부한 사람은 그것 이외는 그 어느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정작 ‘모기의 심장’이나, ‘벼룩의 간‘이라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실 답사는 문사철(文史哲)이 녹아 있는 모든 종합학문이자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답사 중에 만나는 온갖 사물, 온갖 나무나 풀, 역사유물이나 역사의 현장도 중요하지만 그 답사 중에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답사의 미덕이다.
그러한 공부의 폐단을 간파한 사람이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였다. <오래된 미래>에 실린 그의 글을 보자.
“우리는 살아 있는 세계와 좀 더 교감하는 관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보다 넓은 패턴, 과정. 변화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은 생물학자들끼리도 두 사람이 같은 종류의 과실파리를 연구하고 있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명을 조각조각으로 부수고 그것을 시간 속에 동결시킴으로써 어떻게 생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의 정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은 한계에 도달했고, 어떤 과학자들, 특히 양자물리학자들은 이제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최소단위의 물질이 무엇이냐는 낡은 관심으로부터 보다 유기적은 관점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해야할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 심화 된 전문화를 향해 가는 주류문화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서 우리는 비전문지식인 관련성을 알아보고 각기 다른 분야 사이를 연결 짓는 사람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희망적인 추세의 하나는 보다 여성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대한 존경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간에 학제나 학문의 벽이 높아서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학문의 다양성이나 학문의 진취성을 기대하기는 애당초 어려울 것이다. 특히 ‘호지’가 말하는 전문적인 지식인보다 비전문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 그래서 서로 간에 상호보완적인 학문의 열린 지평이 열릴 때 학문은 놀라울 정도의 성과와 함께 공동선이라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다.

벼룩의 간을 보았는가? 아니면 못 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학문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연구했다는 것으로, 학위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기가 전공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옛길만 해도 그렇다. 한 번 걸으면서 보고서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는가?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 스무 번을 보고 걸어도 알 수 없는 길을 이래저래 평가하니, 제대로(?) 파지 않고, 학위도 없는 내가 무슨 할 말을 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논의만 하는 그사이에 그나마 남은 우리나라의 옛길들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옛길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걷지도 않은 사람들이 스폐인의 산티아고 길이나 외국의 옛길을 걷겠다고 가는 것을 말릴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쩐담.
/사진ㆍ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