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긴 역사 속에서 “수기(修己, 몸과 마음을 닦음)”에 관한 한국인의 이해는 어떠한 변천 과정을 겪었을까. 고대로 올라가 보자. 수기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세기 후반이다.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은 영토를 널리 확장했다. 그러고는 여러 곳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자신의 치적을 기념했다. 바로 그 순수비문에 처음으로 ‘수기’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때문에 제왕(帝王)은 연호를 세우고, 나를 닦음(수기)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是以帝王建號 莫不修己以安百姓).”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이라고 했다.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진흥왕은 과연 유교적 도덕에 철저한 임금이었을까.
그 시대에도 유교적 지식을 갖춘 이들은 소수나마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 이해가 후대의 선비들과 똑같았을까. 그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다. 지식인들도 불교에 경도되어 있었다. 유교에 관한 지식은 일종의 교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고려시대에도 지배적인 사상은 여전히 불교였다. 10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최승로(崔承老)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는 성종(재위 981~997)에게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를 올려, 유교적 입장에서 국가 현안을 제시했다. 그 글에서조차 최승로는 임금이 불교의 가르침으로 수신(修身)하고, 유교 경전으로 이국(理國)하기를 촉구했다. 즉 당대의 유교는 통치술을 제공하는 데 만족했다. 치인(治人) 또는 치세(治世)의 도구였다. 그와 달리 불교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수신의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수기와 치인 두 가지를 유교의 역할로 이해한 것은 한참 뒤였다. 정확히 말해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당대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일어난 변화였다. 그들은 『대학』과 그 주석서인 『대학연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들은 태조 이성계에게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태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1392년 11월 14일자).
간관(諫官)들이 상소하였다. “(……) 신 등이 배운 바에 따르면, 군주의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원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따라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온갖 욕심이 이를 공격하게 됩니다. 따라서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선유(先儒)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해서 경연(經筵)에 바쳤습니다. (……)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에 나오셔서 『대학』을 강론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새 왕조의 건국 초기부터 태조는 신하들과 함께 날마다 『대학』을 읽고 수기치인의 방법을 논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학』에 대한 조야(朝野: 조정과 그 바깥)의 관심이 커졌고, 이해도 깊어졌다.
14세기의 큰선비 권근(權近)이 그런 흐름을 주도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자신이 출제한 과거시험 문제에서도 『대학』의 편차에 숨은 뜻을 물었다. 「전시(殿試) 책문의 제」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권근, 『양촌선생문집』, 제33권).
"『대학』은 성현들이 만세에 물려준 법이다. 수기치인의 도리가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선유(先儒) 진씨(眞氏: 송나라의 유학자 진덕수)는 이를 더욱 부연하고 보완하여 『대학연의』를 저술하였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자 하는 왕은 물론이요, 학문에 뜻을 둔 선비라면 누구나 이 책을 참고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 그런데 진씨의 글에는 격물보다 앞서 제왕의 정치 순서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제왕학의 근본을 말했다. 그러고 나서 격물과 치지의 요법을 서술하였다.
그다음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요령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치국과 평천하의 요령에 관하여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권근의 시대, 즉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이르러 수기치인에 관한 선비들의 이해는 한층 깊어졌다. 위 인용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은 『대학』이 왜 치인을 수기보다 먼저 서술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였다. 참고로 『대학』은 제왕을 위한 학문적 길잡이였기에 치인을 수기에 앞서 설명했던 것이다.
16세기가 되면 선비들의 수기 담론은 더욱 깊어진다. 그들은 주희의 학설을 철저히 내면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대의 진보적 선비들은 ‘정심성의’를 수기치인의 요체라고 확신했다. 본디 이것은 주희의 주장이었다. 조광조는 주희의 견해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마음은 출신의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공부한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 식으로 말하면, 선비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길러지는 존재였다.
수기에 관한 조광조 및 일부 조선 선비들의 인식 수준은 송나라에서 집대성된 성리학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주희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한층 발전시킨 쾌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게 여길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1518년(중종 13) 5월 4일, 석강(夕講)에 나는 주목했다. 그때 조원기(趙元紀, 조광조의 숙부)와 조광조 등이 경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아래에서는 그 점을 유심히 살펴보자(『중종실록』, 중종 13년 5월 4일자 기사).
“특진관 조원기가 (『대학』의) 본문을 살펴보고 나서 아뢰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는 정심성의(正心誠意)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심성의만 하면 이른바 충신의 도까지도 다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자(朱子)가 늘 정심성의를 임금에게 권하자,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정심성의란 말을 임금께서 듣기 싫어합니다. 다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주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배운 것이 이 넉자뿐이다.’ 효종과 광종은 송나라의 어진 임금이었으나 이 말씀을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정심성의로 일을 하신다면 장차 교만하게 될 우려가 전혀 없으실 것입니다. (……)”
시강관 신광한(申光漢)이 아뢰었다.
“(……) 사노(私奴) 여형(呂衡)이란 사람은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안국에게서 『소학(小學)』을 빌려다 읽었고, 안국이 (경상감사 자리에서) 교체되어 (서울로) 올 때 글을 지어서 바쳤습니다. 그 글에는 유자(儒者)들도 미치지 못할 (탁월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안국이 여기(곧 서울) 있다면 그 글을 가져와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광조가 아뢰었다.
“그(즉여형)가 지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일의 선후를 아는 사람입니다. 천한 신분임에도 이와 같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허통(許通: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줌)할 수는 없다 해도, 특별한 포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선 면천(免賤)을 허락하소서. 또 제가 들으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대대로 주인에게 충의를 다하였다고 합니다.
여형처럼 (아름다운) 행실을 천한 사람 중에서 어찌 쉽게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의 본래 마음은 귀천이 다르지 않은 법입니다. 타고난 천성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사람의 악한 점을 바로잡는 것은 오직 교화(敎化)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형은 16세기 경상도에 살았던 사노(私奴)였다. 그런데 그는 학문을 좋아했다. 마침 조광조의 동료 김안국이 경상감사가 되었기 때문에, 여형의 인품과 능력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경연에서 여형의 사례를 자세히 아뢰었다. 그와 그의 부조(父祖)를 표창하자고도 주장했다.
조광조는 여형의 예를 들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귀천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정심성의로 수기에 전념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에게 사노 여형의 사례는 여간 고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519년(중종 14) 겨울, 조광조의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중종과 몇몇 측근들의 미움을 받아, 조광조는 유배지 화순에서 사약을 마시고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향년은 겨우 38세였다.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 출판콘텐츠 선정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