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동학농민의 지도자로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전봉준이었다. 폐정개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도 그였는데, 오지영이 쓴 <<동학사(초고본)>>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1895년 초반에 서울의 평리원(재판소)에서 내부대신 박영효와 전봉준이 주고받은 문답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박영효: ... 너(전봉준)는 감히 도적들을 끌어모아서 난리를 일으킨 놈이다. 반란군을 몰아서 전주(‘영읍’)을 함락하고 군기와 군량을 빼앗았고, 높고 낮은 관리를 마음대로 죽이고, 나라의 정치를 감히 무례하게 처단하였다. 국가의 세금과 국가의 공금을 사사로이 받았고, 양반과 부자를 모조리 짓밟았으며, 노비 문서를 불태워 윤리(‘강상’)를 무너뜨렸다. 토지를 똑같이 나누어 국법을 혼란하게 만들었으며, 많은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핍박하고, 정부를 무너뜨려 새 나라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곧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찌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느냐.

전봉준: 도(道)가 무너진 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슨 잘못이오. 우리나라 사람은 스스로 찾은 도와 학문이 없고 어느 때까지나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 항상 남이 만들어 놓은 도와 학문만을 추구하고 의지하며 복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란 말이오?

박영효는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 한때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주역이었다. 그의 눈으로 볼 때 전봉준은 대역 죄인이었다.

그 이유도 다양했다. 전봉준은 지위 고하를 떠나 부정부패한 관리를 마음대로 처단하였고, 백성을 괴롭혀온 악질 양반과 부자들도 엄벌하였다. 또, 노비 문서를 불에 태워 그들을 양민으로 만들었다. 더구나 전답을 백성에게 고루 나눠주기도 하였는데, 이 모든 행위가 한 가지 특별한 목적을 지향했다.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한때 부르주아 혁명가였던 박영효의 판단으로는, 금도(襟度)를 벗어난 대역죄인이 바로 전봉준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그러한 비판에 수긍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굳은 신념이었는데, 동학농민이 벌인 여러 가지 일은 죄가 될 수 없었다. 전봉준은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즉, 조선에는 올바른 학문도 없고, 인간의 삶에 기준이 될만한 도덕도 없었다. 그러므로 동학이라는 진정한 학문을 바탕으로, 자신과 같은 동학농민이 새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하등 죄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동학을 일컬어 전봉준은 우리가 스스로 발견한 이치(道)와 학문이라고 하였다. 외래 사조에 흔들리기만 하는 박영효 따위의 낡고 허약한 지식인의 호통, 그쯤은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전봉준의 호기가 느껴진다.

전봉준은 부자의 농경지를 빼앗아 백성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하였다. 박영효는 그렇게 비판했다. 이러한 주장은 과연 사실이었는지를 아직 정밀하게 조사하지 못하였으나, 충격적인 내용임에 틀림없다.

동학은 ‘대동사회’의 실천

1894년 12월 2일, 전라도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 그는 이른바 동학당 정토군 독립 제19대대의 사령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에게 신병이 인계되었다. 미나미는 전봉준을 취조하여 구두 진술서인 <구공서(口供書)>를 작성했는데, 전봉준은 자신의 최종 목적이 “농업소유관계(‘田制·山林制’)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떳떳이 밝혔다.

그는 소유관계를 장차 어떻게 바꾸려고 하였던 것일까. 앞에서 말한 대로 <<동학사>>에서는 농경지의 ‘평균분배’를 시행하였다고 기술했다. 과연 그 뜻이 얼마만큼이나 실천에 옮겨졌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전봉준과 동학농민의 바람이 사회경제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의 전면적 혁신은 동학의 교조였던 최제우의 꿈이기도 했다. <<용담유사>>를 펼쳐보면,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라는 유명한 구절이 보인다. 다가올 후천개벽의 시대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이 된다고도 선언하였다. 사회적 약자도 허리를 펴고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제우의 관심과 배려는 대단히 깊었다.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편찬한 동학의 경전은 두 가지로 되어있다. 우선 《동경대전(東經大全)》은 한문에 능통한 지식인을 위한 것이라 하겠으나, 순한글로 쓴 《용담유사》는 일반 농민과 여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봉준과 같은 평민지식인은 물론이고, 농민과 여성들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의 이상은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한국 전통사회의 오랜 이상인 ‘대동사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동학의 이상을 사상적으로 완성한 이는 다름 아닌 해월 최시형이었다. 우리는 이 점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같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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