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인생따라

통영, 풍광도 아름답지만 다양한 음식도 역시 일품
한국의 나폴리라고 알려진 통영은 그 풍광도 아름답지만 다양한 음식도 역시 일품이다.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어느 봄날에 가서 먹었던 멸치회도 일품이었고, 이른 아침 통영 항 허름한 쫄 복집에서 먹었던 쫄복탕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통영의 음식이다.
하지만 통영을 대표하는 음식은 누가 뭐래도 충무김밥일 것이다. 대부분의 김밥과 달리 속에 내용물을 넣지 않고 밥만 싼 김밥에다가 어슷어슷하게 썬 무우로 담근 김치와 낙지 새끼 비슷한 쭈꾸미 볶은 것을 곁들여 먹는 것이 충무김밥이었다. 이 김밥은 오랜 역사 속에 전해져 내려온 음식이 아니라 1945년부터 부둣가에서 행상을 하던 ‘뚱보할매’라고 불리는 어두이씨가 만들기 시작한 김밥이었다. 여름마다 속에든 고명 때문에 김밥이 쉬게 되자 김밥과 반찬을 따로 만들어 팔았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한려수도 한 눈에... 남망산공원에서 바라보면 미륵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여
또 통영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음식점이 문화동의 쪼깐이 집이다. 비빔밥과 국밥을 함께 파는 이 집 주인 할머니가 쪼깐해서(작아서)쪼깐이집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당시 충무 사람들은 그 할머니가 간을 맞추어 내 주던 그 비빔밥을 ‘쪼깐이 주어서 맛있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나라 안에 대표적 비빔밥인 전주비빔과 달리 통영 비빔밥은 콩나물, 숙주나물, 박나물, 시금치 나물에, 육회와 싱싱한 홍합과 바지락을 볶아서 얹는 것이 특징이다. 통영의 별미를 맛보고 남망산 공원에 오른다. 통영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 뵈는 곳에 청마 유치환의 깃발이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라고 시작되는 깃발을 읊조리며 오르면 큰 칼 찬 이순신 장군이 서 있다. 남해의 푸른 바다와 올망졸망한 산들이 펼쳐놓은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한 한려수도의 가운데쯤에 위치한 곳이 통영이고, 한려수도가 한 눈에 내려다뵈는 남망산공원에서 바라보면 미륵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섬이 미륵섬이다.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 가득한 통영의 한려수도
세병관과 충렬사를 지나 충무교를 건너면 미륵섬의 봉평동이고 여기서부터 미륵섬 일주도로가 시작된다. 본래 거제군 지역인 이곳은 봉수와 해평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데, 이곳 해평에 슬픈 이야기 한 편이 남아 있다.
옛날 이곳 해피이라고 불리는 해평에 가난한 고기잡이 부부가 살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같이 간 뱃사람들 말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밤 새워 울고 있던 그 아내는 이튿날 뱃사람들을 졸라서 배를 타고 남편이 빠진 곳에 이르자, 옆 사람이,미쳐 말릴 사이도 없이 바닷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본 어부들이 바다로 뛰어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는데, 그로부터 3일 후에 해평 바닷가에 남편을 부등 켜 안고 있는 그녀의 시체가 밀물에 떠밀려 들어왔다.
삼진포가 영운리로 아름 바뀐 것은 1914년, 일제가 불명예스럽다고 여겼기 때문
이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긴가, 이러한 사실을 지켜 본 마을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그 뒤로 마을에 우환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해피이 산의 나뭇잎이 ‘해평열녀(海坪烈女)’라는 형상으로 벌레가 파먹어 들어갔다. 이상하게 여긴 통영 통제사가 나라에 보고하여 해평에 사당을 짓고, 열녀비를 세워 원한을 풀어주니 그 뒤부터 마을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그 뒤로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지내고 그녀의 정렬을 추모라고 있다.
봉평동과 도남동 사이에 있는 해평현터를 지나 도남동에 이른다. 도남동의 도미 마을 북쪽에는 공주도라고 불리는 섬이 있다. 그 섬은 바닷물이 빠지면 들어갈 수 있다는데 그 형상이 신룡(神龍)이 가지고 노는 여의주와 같은 형국이라고 한다. 이곳 도남동에는 작은 밭깨 큰 밭깨라고 부르는 개가 있는데, 이곳에서 발을 치고 청어를 잡았다고 한다. 충무공설해수욕장을 지나 수룩재를 넘어가면 영운초교가 있는 영운리에 닿는데 이곳의 원래 이름이 삼진포(三鎭浦)였다.
산양읍 영운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진인 삼진포는 속칭 ‘삼칭이’라고 불렀는데 고려시대에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그런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삼진포가 영운리로 아름이 바뀐 것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일제가 자신들에게 불명예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통영 당포성... 이순신 장군 요새 수두룩

이곳은 주위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천연의 요새로 한산도와 마주하여 수군통제본영을 보호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한산도 일대가 선조 25년(1592) 7월에 조선 수군이 싸울 힘을 잃고 퇴각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추격한 왜군을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함대가 큰 싸움을 거둔 격전지다.
이순신은 한산도 싸움에서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을 치고 왜군 70여척 가운데에서 59척을 격파하였고, 그 싸움이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에 들었다. 남쪽 이윤 마을 뒤의 불선봉은 왜구의 동정을 알린느 봉화대 자리였다고 하며, 적정을 파악하고 지휘를 하였다는 북 바위가 바다에 있다.
그리고 이곳에 화약고 터. 말을 매두었다는 마방 터, 객사 터, 활터 등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경작지로 변하고 말았다. 이곳은 지형 상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전쟁 때에도 거의 피해가 없었고, 질병도 적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가 마치 육지의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다가 통영이 고향인 소설가 정정대 선생으로부터 멀리 우뚝 솟은 복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바위가 남근처럼 생겨서 그런지 이 마을 남자들이 바람을 자주 피우게 되자 바위 한쪽을 폭파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해서 마을 남자들이 속깨나 상했다는 이야기였다.
일운과 양달 마을을 지나 포란개 마을을 이르자 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이고 산양읍 신전리다. 신봉동과 봉전동을 합해서 이름 지은 신전리의 음촌陰村은 신봉의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고, 봉전은 새바지라고 부른다. 새바지 고개라고도부르는 봉전고개를 한없이 넘어가자 미남리 달아마을에 이르고 다시 올라가자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달아공원이다.
오곡도, 학림도. 연대도. 만지도. 송도. 저도. 유도, 대장두도. 소장두도. 가마섬 그 너머 멀리 욕지도가 보이는 이 달아공원에서 나는 푸른 바다가 되고, 푸른 산이 되고, 한 점 작은 섬이 된다. 길은 달애 꼭(고개)를 넘어 연화리로 이어지고, 윗 마을 아랫마을을 지나면 당포성이다. 원항 마을의 남쪽에 있는 당포성은 1592년 6월 2일 이순신이 20여척의 배로 왜선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당포성은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의 야산 정상부와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이 병사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성을 쌓고 왜구를 물리친 곳이라 전한다. 그 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당포성이 점령당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는데, 이것이 당포승첩이다.
통영 미륵섬 삼덕리의 노을
이 마을 당산나무 밑에 돌로 만든 남녀 장승 한 쌍이 남아 있다. 통영시 삼양면 삼덕리 원항(院木)마을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제당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중요민속자료 제 9호로 지정된 삼덕리 마을제당이다.
이곳 삼덕리의 마을제당은 장군당. 산신도를 모신 천제당. 그리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돌장승 한 쌍과 당산나무 등을 모두 포함되어 중요민속자료 제 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이 제당에 복을 비는 것은 이 제당이 신령함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지역 사람들의 믿음과 정성이 지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활목이라고 부르는 궁항(弓項)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 밑에도 돌장승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마을 북서쪽에 장군봉이 있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고갯마루에도 양쪽 길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돌장승이 있다. 큰 것이 남자 장승으로 높이가 90cm이고 여자 장승은 크기가 63cm쯤 된다.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어 세웠으나 70여 년 전에 돌로 만들어 세웠다고 전한다.
쉽지는 않지만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좌측으로 펼쳐진 삼덕리 포구에 배들은 눈이 부시게 떠 있고, 바라다 보이는 마을은 그림 속처럼 평안하기만 하다. 울창한 나무 숲길을 헤치고 오르다 보면 암벽이 나타나고 조심스레 오르다 보면 밧줄이 걸려 있다. 겁이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코스는 아니지만 조심스레 오르면 갈만하다.

그 코스를 지나면 마당 같은 바위에 오르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미륵섬 일대가 마치 보석과도 같다. 다시 숲 사이 길을 조금만 더 오르면 장군당에 이른다. 장군당 가기 전에 있는 천제당에는 산신도가 한 점이 걸려 있으며 장군당에는 갑옷 차림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장군봉의 산신 그림이 걸려 있다.
야싯골 서쪽 물뱅잇골에는 물레방아가...
그림 속의 주인공은 고려 말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피살당한 최영장군이라고도 하고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순신 장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앞에 목마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철마(鐵馬)였다고 한다. 그 철마가 없어진 뒤 이 목마로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당바위에서 길을 내려오다가 넓은 마당 같은 바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서남쪽으로 쑥섬. 곤리도. 소장군도가 보이고, 북서쪽으로는 오비도 월명도 등 크고 작은 섬이 있으며, 서쪽으로 통영시에 소속되어 있는 사량도가 보인다.
멀리 보이는 저 사량도에는 옥녀봉 전설이 있다. 옛날 사량도에 옥녀라는 처녀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요구하자 “아버지가 소처럼 울면서 산 위로 기어 올라오면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산에 올라가 절벽에서 떨어져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사량도에서는 대례(大禮)를 치러보지 못하고 죽은 옥녀를 위하여 결혼 할 때에 대례를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에 접한 산형은 지세를 따라 끝났는데, 공중에 가득한 바닷빛..."
삼덕리에서 남평리는 지척이다. 이곳 남평리에도 기억해둘만한 지명들이 여러 곳이 있다. 작은 망 서쪽에 있는 미지봉은 날이 가물면 무지(무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고, 탑내와 상촌에 걸려 있는 야싯골은 조선시대에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었던 곳이다. 죽전 북쪽에 있는 궁집 마을은 옛날 딘전에서 수확한 곡식을 쌓아두었던 곳이며, 야싯골 서쪽에 있는 물뱅잇골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 산양면 남평리에서 미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점심고개다. 옛날 이 고개에서 군사들이 점심을 먹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려수도의 중간 쯤에 자리한 통영은 한국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인 대하소설 ‘토지’를 지은 박경리와 김상옥, 김춘수 등의 시인들이 태어난 곳이다. ‘깃발’의 시인 유치환과 극작가 유치진의 고향이 이곳이다. 분단조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독일에서 숨진 작곡가 윤이상씨와 화가 김형근, 전혁림씨도 이곳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그들의 꿈을 키웠으며, 비운의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있으면서 남망산 자락아래 펼쳐진 통영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관하(關下)가 아득한데 기러기처럼 남으로 가서, 하늘가를 가로 돌아 철성에 이르렀네. 물에 접한 산형은 지세를 따라 끝났는데, 공중에 가득한 바닷빛 사람 그림자 환하구나.”
조선 중기의 문장가 서거정이 노래했던 한려수도의 바다는 지금도 푸르고 푸른 채 출렁이고 있었다. ※<사람과언론> 11호(2020년 겨울호)
/신정일(문화사학자,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