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으로

평범하지 않은 휴가

아무리 내가 타고 난 집순이라고는 해도, 코로나 때문에 외출을 삼가며 집콕만 하는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신선한 콧바람이 그립기는 했나 보다. 일부러 고른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리뷰하는 두 영화 모두 여행이 소재란 것을 알아챘을 때의 소감이 그러했다.

바닷새의 끼룩거리는 울음소리와 그 아래 펼쳐진 푸른 해변을 마주했을 때, ‘아, 그냥 보기만 해도 좋구나! 이것이 말로만 듣던 랜선 휴가인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소년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올 때, 그 생소한 설렘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게다가 음성보다 한 박자 늦게 대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을 때 느낀 소년과의 강한 유대감은, 이 영화가 단순히 전형적인 성장 영화는 아닐 거라는 확신을 내게 주었다. 가족과 함께 바닷가 휴양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소년은 모래 구덩이를 파고 누워서 생각한다.

“얼마 전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과 인간이 언젠가는 죽을 거란 생각 말이다. 아빠도, 엄마도, 형도 그렇고 나도 말이다.”

초등학생 때 피아노를 치다가, 문득 ‘언젠가 할머니와 부모님과 헤어지는 날이 올 텐데, 그럼 난 어떻게 하지?’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슬픔에 엉엉 울었던 적이 있다. 중학생 때는 선생님께서 “10년 뒤에 자신이 뭐가 되어 있을 것 같은지 써 보세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10년 뒤에 살아있긴 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언가 되어 있다는 것의 전제는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니까.

소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것은 한없이 무겁고 짙은 무채색이 아니다. 오히려 남은 삶을 어떻게 가꿔나갈 것인가에 집중하기에, 소년의 생각과 행동은 눈부시게 푸른 여름 해변의 색을 닮아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이제 더 이상은 평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해변에서의 자유로운 여름휴가. 그 곳에서 사소해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겹쳐지면서 소년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만남, 이해, 성장

아동문학가 안나 왈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테스와 보낸 여름’은 소년과 소녀의 만남과 성장을 밝고 따뜻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후의 공룡은 죽을 때 알았을까? 자기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이런 생각을 하는 샘 앞에 그에 못지않게 4차원인 소녀 테스가 나타난다. 굳이 ‘첫사랑의 열병’이라는 단어까지 가지 않더라도, 호기심이 생기는 낯선 친구와의 만남은 분명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테스와 만난 이후로 샘은 매번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상처를 받게 된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음악에 맞춰 살사를 추자고 하거나, 함께 자전거를 타고 손님에게 숙소 안내를 해 줬다가도 뜬금없이 땡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바닥에 샘 혼자 버려두고 간다거나, 너랑 소풍가려고 했다더니 사실 테스가 기다리던 상대는 샘이 아니라거나.

이건 4차원보다도 예의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 괜히 샘보다 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래, 원래 세상은 혼자 사는 거지. 같이 있어 봐야 상처밖에 더 받아? 에라이~’ 그래서 ‘나중에 혼자 남겨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금부터 혼자 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샘을 더 응원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래사장 위에 판자와 작은 깃발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기지에서 샘은 휴가 동안의 계획을 써 내려 간다. 일명 [외로움 적응 훈련]. 전자시계를 맞춰가며 요일별로 매일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다. ‘열심히 연습한다면 혼자 남게 돼도 괜찮을 거다.’라고 생각하는 샘을 보며, 문득 성인이 되고 나서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이 떠올랐다.

텅 빈 해변에 샘 혼자서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는 모습이 나오다 보니, 육지와 동떨어진 외딴 섬처럼 보여 고독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샘의 ‘외로움 적응 훈련’은 그보다는 독립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는 ‘데미안’의 구절처럼.

상처도, 구원도 모두 사람에게서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던 샘은 위기의 순간에 어떤 할아버지에게서 도움을 받게 된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해그리드의 오두막’ 같은 할아버지의 공간에서 포근함을 느끼던 샘은 할아버지에게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 힘든지 묻는다. 그에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최대한 많은 추억을 모으거라. 함께 보내는 순간들 말이야. 너무 늦기 전에.”

부모님과 형, 그리고 테스에게서도 떨어져 혼자 있기 위해 그들과 멀어졌던 샘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테스가 오랫동안 찾았고 기다려왔던 만남을 위해. 어쩌면 그 만남 또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할아버지의 조언처럼 ‘너무 늦기 전에’ 함께 보내는 순간들과 추억들을 모으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한다.

“이제 외로움 적응 훈련은 필요 없다. 사람들과 함께 하며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샘의 마지막 대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혼자와 함께 사이의 그 어디쯤을 방황하는 게 결국 인생이 아닐까? 타인과의 연결 없이 혼자일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치여서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할 수만도 없기에. 오랜만에 떠오른 시로 안녕을 고해본다.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인 전현종)

/김명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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