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서울 인사아트센터서 열어
-인간과 자연’ 주제로 30여점 신작 선봬

40년을 한결같이 외길을 걸어온 ‘성찰과 인간애’의 화가 이경섭이 ‘인간과 자연’을 주제로 19회 개인전을 연다.

다음달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그의 회화인생 40년을 결산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붉은 집’ 등 모두 신작들로 이뤄져 모두 30여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바람부는 날’, ‘시간여행’, ‘그해 여름’ ‘그때 그 시절’ 등 출품작 제목에서부터 화가의 인간에 대한 성찰과 자연에 대한 시선, 관조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난다.

이들 전시작품을 마련하기 위해 이경섭 화가는 1년 내내 매달렸다. 특히 150호 대작 ‘그때 그 시절’은 눈이 아파오는 데도 매달린 회심의 역작이다. ‘그리운 날’ ‘순령수’ ‘독백’ 연작 등은 사람사이에 벌어지는 관계와 소문에 대해 그림을 통해 돌아보고자 한 작품이다.

‘시간여행’ ‘푸른 밤’ ‘폐가’ ‘다산옥’은 우리 삶의 모습과 지나간 추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우리네 삶터의 흔적이다. ‘바람부는 날’, ‘가을의 전설’, ‘그해 여름’은 사람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추억과 사연을 담아내려고 했다.

‘노암리’ 연작은 이경섭 미술관이 자리한 주변 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이경섭화가가 줄곧 파고들어온 주제인 인간에 대해 성찰해보고 자연에 대한 고민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경섭 화가 작품 '반야'
이경섭 화가 작품 '반야'

이경섭 화가는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인간과 자연을 돌아보고자 했다”면서 “40년의 화단 외길이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어려운 처지의 동료화가나 우리 이웃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무릇 작업하는 예술인들이 수 없이 반복되는 번민과 갈등을 안고 내일을 기약하지만 우리화가의 삶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이경섭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경섭은 “육신은 비록 늙어가지만 정신은 푸르름을 잃지 않으리. ‘푸른 정신’을 그림에 넣어보자. (2015.4.22.)”라며 창작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하루도 붓을 놓지 않을 정도로 작업에도 열중하면서도 꾸준히 일기를 쓴다. 일종의 작품노트인 셈이다. 거기엔 작품에 대한 반성도 있고 자신에 대한 채찍질과 다짐도 있다.

이경섭 화가 작품 '고도에서'
이경섭 화가 작품 '고도에서'

그 가운데 한 대목에는 이런 글귀도 보인다. “최선을 다했는가. 내 얘기를 다 토했는가. 보고 또 봐도 안심할 수 없는 그림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다.”(2010. 5.28)

“나이가 들었다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리라. 결코 좌절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리라. 그리고 기다릴 것이다. 나의 예술과 철학을 인정하는 세상을.”(2014.10)

‘얼마나 더 그리워해야 새하얀 돋을 별이 그 말간 얼굴을 내밀는지(2019)’라는 작품 속 화제처럼 그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이경섭 화가의 붓질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이경섭은 1991년부터 개인전 18회를 열었고, 1983년부터 국내외에서 단체전시회 350여회에 출품할 만큼 커리어 하이를 구가하는 작가다.

이경섭 화가 작품 '독백1'
이경섭 화가 작품 '독백1'

한편 이경섭은 지난 여름 수해를 입어 작품 수십점을 고스란히 폐기할 만큼 충격을 받았으나 이를 극복하고 이번 전시회를 갖는다.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면서 제자들과 함께 지난 10월 14일부터 4일간 남원시 노암동 마을벽화그리기 자원봉사로 주민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인터뷰>

#이경섭 미술 40년을 결산해 본다면?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한길을 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다른 일 않고 전업작가로서 외길을 걷는다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 땅 화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인내심도 중요하지만 끈질김이 없어서는 안 된다.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다른 짓 안하고 오로지 그림만을 그린다는 다짐도 만만찮았다. 겪어보니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봉급 받으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끝끝내 견뎠고 오늘에 이르렀다. 내 미술인생 40년이 나와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자임한다.

#코로나19 땜에 전시가 어렵지 않은가

코로나19가 오히려 전시를 하겠다는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나는 안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럴 때일수록 더 굳건하게 전시를 강행하고자 했다. 전시가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꼭 하고 싶었다. 언제는 어렵지 않은 적 있었나. 많은 화가들이 전시계획을 취소하는 등 주변에서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그럴수록 더 전시회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전시장 관계자들이 오히려 고마워 할 정도다.

관람객들이 줄어들 것 같아서 전시하는 게 오히려 아쉽고 안타깝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전시를 통해서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위안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었다. 후배 화가들에게도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화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그 작품이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면 작가는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그동안 가장 인상에 남던 어려웠던 점이나 시기가 있었다면?

이경섭 화가 작품 '독백3'
이경섭 화가 작품 '독백3'

10여년 전 50대였을 때 작업실이 남의 집에 세들어 살 때였다. 작업에 대한 의지는 한참 활활 타올랐지만 작업실 앞에만 가면 들어가기가 싫었다. 밀린 집세 때문이었다. 주인이 독촉하면 작업실을 못 들어가고 주변 들로 산으로 빙빙 돌았다. 한 달에 몇 십만 원밖에 안되지만 두세 달만 넘으면 백 몇십 만원이 밀렸다. 어쩌면 그렇게 집세 낼 날짜는 빨리 돌아오던지.

3·40대 때는 그러려니 하고 몰랐는데 50대가 되니 집세가 부담스러워 이건 이대로 안되겠다 싶었다. 교사자격증도 있는데 다른 일 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싶어 전업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싶었다. 짧은 기간 동안 기간제 교사 등을 해봤으나 아이들 가르치는 문제가 심신이 여간 지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 그림에는 소홀해졌다. 어려워도 전업으로 그림을 끌고가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업으로 다시 돌아왔다.

올해는 지난 여름 수해 때문에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힘들었다. 내 작품 수십점이 고스란히 물에 잠겨 폐기할 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며칠간 멘탈리티가 무너졌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남원시 노암동 마을벽화그리기 자원봉사로 무너진 내 마음을 다독이고 추스렸다. 그걸 견뎌낸 것이 내 그림인생의 일대 사건이 아닐까 한다.

#이번 전시에 특별히 신경 쓴 점은?

인간과 자연을 재해석 해보고 싶었다. 나이라는 게 참 희한하다. 예전 젊었을 적 날카롭게 바라봤던 것들을 이제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진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나도 어렵지만 저 사람들도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고 미뤄 짐작하게 된다. 그러니 그들을 따뜻하게 그려보자 하고 마음먹게 된다.

그림도 예전엔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방황했다면 지금은 갈 길을 찾아서 안착하는 등 달라졌다. 이게 바로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방증 아닌가.


<참고>전시도록 게재 인물론 

모래 먹는 나한(羅漢)’ 화가 이경섭 

讀法 1 

Baudelaire를 어떻게 읽는가. ‘보들레르’ 아니면 ‘바우델라이레’? 어떻게 읽으나 그 사람이 Baudelaire인 것은 변함이 없다. Paul이 ‘폴’로 읽으나 ‘바울’로 읽으나 ‘파울’로 읽으나 ‘바오로’로 읽으나 매 한가지인 것처럼. 의미론적으로는 같으나 발음만 다를 뿐이다. 요는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는 데 있다.

시집 ‘악의 꽃’에는 정작 ‘악의 꽃’이란 시가 없다. 그러면서도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왔다. 역겹거나 거북한 시어들도 없다. 그런데도 보들레르는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했다. 근대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한권의 시집으로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도 세계문학사상 유례가 없다.

그림은 더욱 그렇다. 꽃을 그리지 않았는데도 향기가 난다. 그것이 그림이다. 화가의 화의(畵意)란 어지간한 필력으로는 이룩해내기 어렵다. 때로는 의도했던 화의는 도망가 버리고 앙상한 형해(形骸)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생 붓과 씨름할 수밖에… 

讀法 2 

관세음보살을 왜 그처럼 부르는지 알리라. 소리를 본다(觀音)?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하게 느껴지는가. 유식(唯識)을 모르는 무식의 소치다. 관세음은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 관세음은 귀로 볼 수 있다. 초능력이 아니다. 단련된 인격력(人格力)이다.

명의는 손으로 만져만 봐도 병을 안다. 탁월한 연주가는 악보를 보기만 해도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이치와 같은 맥락이다. 빼어난 화가는 보는 것으로 이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럴진대… 잘 보자꾸나. 잘 보는 것이 잘 읽는 지름길이다. 잘 듣자꾸나. 잘 듣는 것이 잘 보는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잘 보는 것은 잘 그리는 것의 지름길인가?

수십 년 동안 보기만 잘 한다고 잘 그리는가. 아니다. 그런 화가는 그냥 볼 줄은 알아도 그릴 줄은 모르는 숙맥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쉬지 않고 그려야 한다. 그것이 화가의 본분이다. 스스로 택한 유쾌한 고행이다. 이경섭은 40년을 쉬지 않고 끈질기게 붓질했다. 

讀法 3 

숨이 멎을 것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2008.9.29)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훌륭합니까.(2008.11.2)

사람이, 자연이 줄 수 없는 색을 만들어야 한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여 그려야 한다.(2008.11.26)

한 달간 그림과 사투를 벌였다. 가슴에서 솟구치는 주제와 만났는지 모르겠다. 눈이 아파 와서 조금만 쉬었다 가고 싶으나 얼마 남지 않은 개인전이 뒷덜미를 낚아챈다. 다시 작업대에서 서성인다.(2010.4.27)

최선을 다했는가. 내 얘기를 다 吐했는가. 보고 또 봐도 安心할 수 없는 그림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다.(2010. 5.28)

그림이 안 그려지면 智異山 골짝에 들어앉아 있는 것보다 더 외롭다.(2011. 6.10)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모습이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웃는 아침. 그림 그리려고 왔으니 열심히 그림 그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2012.12.15)

그림은 늘 제자리에서 나를 향해 발언하고 있으니, 육신은 비록 늙어가지만 정신은 푸르름을 잃지 않으리. ‘푸른 정신’을 그림에 넣어보자. 그리하여 망각하더라도 기억하고 간직하리라.(2015.4.22)

이경섭은 ‘작가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회의했다. 자책하고 반성했다. 그렇게 자신을 고통의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이경섭 화가 작품 '노암리'
이경섭 화가 작품 '노암리'

그리고 心法 

이경섭은 모래 먹는 나한(羅漢)이다. 속언에 나한에도 모래 먹는 나한이 있다고 했다. 화가가 신분상 높은(?) 직업은 아니지만 궂은일도 마다 않는다. 화가는 그냥 화가일 뿐 신분에 높낮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이경섭은 그림이라면 어떤 고달픔이나 육체적인 혹사도 감내한다. 숱한 실험은 그림 작업이 마치 거친 막노동처럼 험하고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모래 먹는 나한(예술가)이다.

이경섭은 “늘 노동같은 작업으로 일관한다. 조금 노곤하다 해서 함부로 눕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말한다. 이경섭은 언제고 맑은 마음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마음을 놓치거나 게을러지기 시작한다 싶으면 어머니의 마지막 임종 찰나를 떠올린다. 生의 마지막 눈빛, 어머니의 그 눈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경섭의 화의(畵意)가 보이는지… 

/이강록 기자(<사람과 언론>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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