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과거란 무엇인가?
돌아갈 수 없는 것,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회상할 수 있고, 그 시절들이 아름답게 혹은 쓸쓸하게 채색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전북 장수에서 진안 백운으로 넘어 가던 서구리재, 옛 이름 마령하를 넘어가던 그때가 열다섯 살이었다.
장생포에서 마지막 남은 여비까지 떨어지고 말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 울산에서 경주까지 걸어갔고 경주역에서 나는 지치고 말았다.
그 다음엔 말해 무엇하랴. 경주에서 대구로 '도둑열차'를 타고 갔고, 내릴 곳을 모르는 나에게 샛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을 만나 그들을 따라가다가 보니 어둑한 길이었다.

대구 시내를 정처 없이 걸어가다 만난 사람들이 구두를 닦는 청년들이었다. 그들 집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세상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들었다.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고마움을 느낀다.
밑바닥 생활을 하면 나쁜 조직들을 연상하게 되고 그들로 보아서는 갈 곳도 없는 나를 똘마니나 구두닦이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내가 순진해 보였거나 아니면 그 당시 그들의 삶마저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생을 더 하는 것이 좋을 끼다. 그러니 대구에서 고향까지 한번 잊어버리고 걸어가 봐라. 시간은 걸릴끼다, 그러나 큰 체험이 될 끼다. ”
그 말을 듣고 고령 거쳐 합천, 거창을 거쳐 장수에 이르는 길에 겪었던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을 어떻게 설명하랴.
어떤 때는 남의 집에 들어가 재워 달라고 하지도 못한 채 남의 집 추녀 밑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어떤 때는 어둠 속에서 별을 보고 걸어가기도 했다.

변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는 길라잡이별이 바로 북극성이라고 했다. 어떤 날은 산길에서 하루 종일 딸기 같은 산 열매만 따 먹기고 가기도 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자유를 찾아 나섰던 길, 그 자유를 찾아 그 해방감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던 길, 내 마음은 한없이 서글프고 슬프기만 했다.
어쩌다 생텍쥐페리의 <전투조종사>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
“해방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약 사막에서 경험도 없는 사람을 해방시킨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어딘가에 갈 수 있는 사람에게 대해서만 자유라는 말이 적용된다. 그 사람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그에게 갈증을 가르쳐주고 오아시스로 통하는 길을 안내해주는 일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가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중량이 없다면 돌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돌은 자유롭게 된다 하더라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그 때 나는 해방감의 의미나 자유라는 의미를 모르고 떠났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던 길, 그렇게 멀었던 그 길을 걸어 올 때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굶주림이었다. 돈은 떨어졌지, 가뜩이나 내성적이라서 어느 집이라도 찾아가 배고픔을 호소하고 밥을 얻어먹지도 못했다.
“지상에서 내가 안 가장 아름다운 것, 아아! 나타나엘, 그것은 나의 굶주림이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실린 구절처럼 굶주림은 아름다움이자 고통이며 치욕이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걸어서 도착한 장수읍 대성리의 고림하 남쪽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지금은 개통된 팔공산의 북쪽에 있는 마령재를 넘었다. 백제 때 장군의 말이 이 고개에서 죽은 후 3년 동안 밤마다 말 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전설 속의 고개, 말이 고개지 제대로 난 길도 없었다.
수풀을 헤치고 그저 넘어가면 신암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넘다가 보니 소풍 때문에 여러 번 와서 낮이 익은 신암리 저수지가 나타났다. 신암리에서도 내 고향 백암리는 제법 멀다. 시나브로 걸어서 고향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붙들고 말없이 울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여행이 내 인생에 있어서 맨 처음의 가장 긴 여행이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선 멀고 먼 여정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여행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사는 것도 배우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괴테가 <이틸리아 기행> 중 나폴리에서 쓴 글이다. 인생의 마지막이다. 하고 출가했다가 결국 다시 나와서 오래고 오랜 시간을 떠돌았던 그 여행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었던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었다. 다만 내가 혼자라는 것, 이 우주 속에 내 던져진 절체절명의 고아라는 것, 내 식대로 살 수 밖에는 없다는 것, 그것을 깨닫는데 그토록 오랜 기다림과 고통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어쩌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나, 태어나는 것이나, 참아야 하는 것, 원숙이 제일이다.” 라는 <리어왕>의 에드가의 말이나 “나그네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나니 참고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낙樂이다.”라는 <유리알 유희>의 구절을 미리 실감하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 먼지만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여러 꿈을 꾸었다. ‘집으로 가면 새로운 내게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고향은 말 그대로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새로울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가난한 산촌마을에 있는 고향일 뿐이었다. 내 일상은 이도 저도 아닌 속에 그저 함몰되어 갈 뿐이었다. 그 아픈 기억들이 나이가 들어가는 요즈음에 다시 아름다운 기억으로 되살아 나고 있으니, 글쎄 ‘세월이 약’이라는 이야기가 맞다 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책을 써내고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반대로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느라고 3년간 여행을 하며 지냈다. 배운 것을 떨쳐 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되었던 모든 지식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참다운 교육의 시초였던 것이다.”

<지상의 양식>의 몇 소절처럼 내게는 시련의 시절이었고, 새로운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그때 이후 내가 다시 자유를 찾아 떠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때 내 인생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었다.
가을 빛이 완연한 팔공산과 선각산 사이의 고개 일대는 찬연했고, 내 마음은 가을비가 내리듯 처연하기만 했다. 이미 지난 지나서 먼 과거가 되었는데도 가슴속에서 물밀 듯 밀려오던 먼 기억들.
/사진ㆍ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