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김종직은 몸가짐도 단정하고 성품도 무척 성실하였다. 학문도 심오한 데다 문장 역시 고상하고 고졸하여 당대의 유종(儒宗)이었다.
그런데 그는 체구가 퍽 왜소하였다. 어느 날 문장가 어세공은 장난삼아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서 재주를 다 빼앗아버린다면 조그만 어린아이 하나만 남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박장대소하였단다.
젊은 시절부터 김종직은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김숙자에게서 배웠고, 김숙자는 고려 말의 대학자 야은 길재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았다. 많은 선비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실력을 닦았다. 그들은 스승인 김종직을 기려 저절로 하나의 당을 이루었다.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로서는 촉각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훈구파는 조정의 권력을 사림파와 나누는 것이 불편하였다. 그들은 사림파의 조정 진출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훈구파는 무오사화를 일으켰고, 이후 반세기 동안 세 번의 사화가 뒤따랐다.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 및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가 그것이다.
갑자사화와 을사사화 때는 훈구파중에서도 피해자가 나왔으나 사화라면 사림파 인사들이 박해를 당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사화가 거듭되자 학문과 인격이 출중한 사림은 조정에서 밀려나 향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초야에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전국 어디에나 사림파가 말 그대로 인재의 숲을 이루었다.
명종 말년이 되자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이 힘을 잃었다. 그들과 한편인 훈구파도 조정에서 축출되었고, 그 자리를 사림파가 조금씩 채워갔다. 그 뒤 사림파는 선조를 옹립하였다. 그들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수년 후에는 전국이 사림 일색이 되었다.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사림파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16세기 조선의 사림파는 모두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모든 선비의 학맥이 직간접으로 김종직이라는 한 사람의 거장에게 이어져, 사림이라면 누구든 김종직의 성리학과 그에게서 비롯한 독특한 문장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김종직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전아 典雅하고 온자(醞藉, 고상하고 멋짐)한 문풍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였다. 그와 동시대의 문장가인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은 김종직의 문장론이 편향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모름지기 문학에도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성현의 미학이었다. 성현은 〈문장의 변화〉라는 글에서 김종직을 격렬히 비판하였다(성현, 《허백당문집》, 제13권).
성현은 문장을 뜨락의 나무에 비유했다. 나무는 가지와 줄기, 꽃과 잎이 무성하게 자라야 하고 그러려면 뿌리를 잘 보호해야 한다. 다른 예를 들면, 요리사가 여러 맛을 적절히 조합해야 멋진 요리가 탄생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김종직의 문장론은 마치 가지와 잎사귀를 마구 베고 따낸 다음에 그 나무가 무성하기를 바라는 셈이라고 했다. 요리사가 다양한 맛을 무시한 채 한 가지 맛만 내면서 훌륭한 요리가 완성되길 바라는 식이라는 뜻이다.
김종직이 강조한 문장 미학의 요체는 ‘평담(平淡)’이었다. 그것은 솔직 담백한 문체였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백은 너무 엉성하고 호탕하며[疎蕩], 두보는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소식(蘇軾, 소동파)은 지나치게 웅장하기만 하고, 육유(陸遊)는 너무 호방하다. 모범이 될 만한 문장으로는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장을 짓는데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용재 성현의 비판은 그러했다. 성현은 전통주의자로서 다원적 입장을 선택했다. 화려한 글이 필요하면 화려하게, 청담(淸淡)이 요구되면 최대한 청담하게 쓰면 된다. 간고(簡古, 간단하고 고졸함)가 필요하면 간고하게, 웅방(雄放, 영웅적이고 호방함)이 요구되면 웅방하게 쓸 뿐이다.
매화와 대나무가 사랑스럽다고 해서 다른 화초들을 몽땅 버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현의 반론은 그러했다. 그가 보기에 김종직의 문장론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전혀 없었다[膠柱鼓瑟].
그러나 김종직도 왜 할 말이 없었겠는가. 그는 〈상설고문진보대전발(詳說古文眞寶大全跋)〉이라는 글에서 어떤 문장이 좋은지 언급하였다(전녹생, 《야은일고》, 제4권). 김종직은 문장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특히 사륙변려문처럼 화려한 문장을 비판하였다. 무릇 글이란 염계관락(濂溪關洛, 주요 성리학자를 범칭)의 성리학설에 부합해야 진정한 보배라고 보았다. 머나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 고대의 주周나라와 한(漢)나라의 미학을 현세에 되살리는 것이 김종직의 소망이었다.
이제 김종직의 미학이 잘 표현된 시 하나를 골라서 읽어보자. 경상도 함양에 학사루(學士樓)라는 정자가 있다. 신라 때 고운 최치원이 이 고을의 군수로 재임할 때 망중한을 즐긴 곳이다.
후세는 최치원을 회상하며 학사루라고 불렀다. 누대 아래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반은 마르고 썩었으나 가지가 살아 있어 해마다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렸다. 김종직은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이래 이 나무를 몹시 사랑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학사루 앞 홀로 선 신선이여.
만나보고 한번 웃자 옛 모습 그대로일세.
가마 타고 지나가려다가 도리어 가지를 부여잡고 위로드리오.
올해는 봄바람이 너무 세서 넘어지실까 걱정이네.
學士樓前獨立仙 相逢一笑故依然
肩輿欲過還攀慰 今歲春風太劇顚
시어가 극히 평범하고 고상하다. 화려한 묘사도 지극한 꾸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담담하기가 한 사발의 냉수와 같다. 한마디로 매화꽃처럼 맑은 향기를 머금은 선비의 시정이라고 해야겠다. 뒤집어 보면 조금은 싱거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선비다움을 물씬 풍기는 정갈한 글이다. 표현도 소박하고 기교를 부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장 구성은 퍽 정밀하고, 은은한 아취가 있다. 하지만 글의 규모는 보는 이에 따라서는 너무 작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성현과 동시대 인물로 역시 김종직의 문장론에 반대한 또 한 사람의 이름난 문장가가 있었다. 사가정 서거정이다. 그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종직의 문장론을 에둘러 비판한 적이 있다.
썩은 유생 또는 속된 선비가 멋진 모자[冠冕]를 쓴 채 예법을 조용히 준수하는 것 같은 글이라는 주장이었다(서거정, 《동인시화》). 이처럼 성현과 서거정은 훈구파로서 새로운 문장 미학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려놓지는 못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김종직의 평담한 문장 미학이 차츰 호응을 얻어 대세를 이루었다.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