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은 용단을 내렸다. 그는 수백에 달하는 전국의 서원을 일시에 철폐했다.

온 나라 안에 오직 47개의 서원만이 명맥을 보전했다. 서원훼철(書院毁撤)에 많은 백성들이 환호했다.

당시 상당수 서원은 적폐의 근원이었다. 드넓은 면세지를 보유해 특권을 누리면서도 무고한 평민을 끌어다가 함부로 노역을 시켰다.

또한 이유 없이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다.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일찍이 실학자 농암(聾菴) 유수원(柳壽垣)은 당대의 교육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정상화였다. 서원의 수가 많다고 해서 국격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 몇 개라도 좋으니, 제대로 운영되는 서원이 필요했다. 훗날 흥선대원군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는 선비들은 반발했다. 경당(鏡塘) 박주운(朴周雲) 같은 선비는 고종의 어전에서 당당히 주장했다. 훼철된 서원들을 모두 복구하라는 것이었다.

“조종조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왕이 현판을 하사한 서원)은 곧 국학입니다. 열성조께서 학교를 일으키신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조정은 예의와 문물이 잘 갖추어져 기자(箕子)의 시대에 견줄 만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서원 덕분입니다. 부디 무너진 서원을 복구하여, 국가의 원기(元氣)를 북돋우시기 바랍니다.”

박주운은 주장은 그랬다. 만약 국가 재정이 부족해서 복구가 어렵다면 민간에 호소하여 기부금을 모아도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서원만은 반드시 재건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호소였다.

그런데 수십 년 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전통을 비판했다. 조선은 책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책으로 망했다. 서원을 비롯한 다양한 학교들을 세운 덕분에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었고, 그 결과 예의와 문물이 크게 떨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을 고집한 바람에 문약(文弱)에 흘렀고, 우리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는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다. 결국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런 재앙이 다시 있겠는가.

서원 본연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점이 궁금해진다. 출발점은 성리학의 큰 스승 주희(朱熹)에게 있었다. 주희는 자신의 뜻이 조정에서 용납되지 않자 무이산에 은거하였다.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임간(林間)을 거닐며 제자들에게 심오한 학문의 정수를 전하였다. 또한, 남강군(南康軍, 장시성)의 지방관이 되었을 때, 그는 많은 기부금을 모아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하였다. 주희는 이 서원의 원장으로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고, 천하의 명유(名儒)를 초빙하여 학문의 향연을 베풀었다.

15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은 주희를 모범으로 삼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일으켰다. 이 땅에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安珦)을 길이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8년 뒤, 마침 대학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가 되어 이 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승격시킬 기회를 얻었다. 이를 계기로 방방곡곡에 서원다운 서원들이 속속 등장했다.

오늘날에는 주요 교육기관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도 그러하다. 갈수록 국가의 심장 격인 서울만 비대해진다. 사지와 몸통에 해당하는 지방은 메말라 간다.

조선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학문을 꽃피운 서원이 고루 퍼져 있어서였다.

겉으로 보면 조선은 중앙집권국가였으나, 그 실상은 ‘선비공화국’과도 같았다. 선비들은 자신들의 향리에 있는 서원에서 학문을 닦았고, 그들의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18세기 이후 서원이 지나치게 많아져 많은 사회문제를 낳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서원의 순기능마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21세기 한국이 나아갈 길을 서원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가령 각지의 서원을 중심으로 시민의 문화적 수준이 제고된다면 지방자치는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또, 서원을 중심으로 지식인과 시민들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할 수만 있다면, 현행 대의정치제도의 약점도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서원은 우리사회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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