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그리스 사람들은 기원전 479년에서 기원전 336년 사이의 이른바 ‘고전기’를 유난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당시 그리스의 사정은 복잡했다. 외세인 페르시아의 압박도 거셌고, 내부에서는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도전도 심각하였다. 난국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정치를 선택했다. 알다시피 경쟁국 스파르타는 모범적인 농업국가로서 자급자족을 꾀하며, 막강한 병영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과 권력을 함께 나누었다. 아테네에서는 세계 어디서나 귀족의 전유물로 알려진 정치권력을 평민들도 함께 행사하였다.

시민들은 추첨을 통해 각종 관직에 선발되었고, 국가로부터 일정한 봉급을 지급받았다. 또한 시민들은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귀족을 찾아내, 10년간 그를 국외로 추방하였다(도편추방). 귀족의 전횡이 사라졌고, 귀족의 부정부패도 일소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이 국가사무에 직접 참여했고, 일상생활에서도 마음껏 자유와 번영을 누렸다.

아테네 시민들은 유사시 자발적으로 전선을 지켰다.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사망한 전몰장병의 추도사에서 페리클레스는 힘주어 말했다.

“우리 시민들은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해 미리 훈련을 받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난관이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늘 엄격한 훈련을 받아온 사람들(즉 스파르타 사람들)만큼이나 용맹합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우리 도시가 칭찬받아 마땅한 한 가지 특징입니다.”

민주주의는 내외의 환란에 시달리던 아테네의 마지막 보루였다.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와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에서 주변국의 예상을 뒤엎고 아테네가 승리한 것도 민주정치의 힘이었다. 바로 그러한 정치적 토양 위에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철학과 문학, 예술 및 자연과학의 발달이 눈부셨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테네의 민주정치에도 약간의 한계는 있었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제국’의 길을 추구한 점도 아쉽고, 출생에 집착해 시민권을 제한한 것도 약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테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국가의 전반적인 한계였다. 아테네가 사상 초유의 정치실험을 했고, 한때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당시 아테네에는 국가의 모든 일에 적극 참여하는 교양시민이 많았다. 그들이 바로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만들었다.

전몰장병 추도사에서 페리클레스는 시민의 참여정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시민은 그 자신의 사업에 충실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외면하는 민주정치는 허울에 불과하다.

※출처: 백승종, <<생태주의 역사강의>>, 한티재, 2017.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서 곧 전자책으로도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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