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혜강 최한기가 순수한 학문적 입장에서 새 시대의 도래를 예측하였을 때 조선의 정치 실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연암 박지원의 손자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나의 시야에 불쑥 들어온다. 박규수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절감하였다.

고종 9년(1872), 그는 세계정세를 정탐하기 위해서 북경으로 갔다. 당시의 지배자이던 흥선대원군에게 요청하여 스스로 사행 길을 떠난 것이다. 여름에 북경으로 떠난 박규수는 그해가 다 지나갈 때에야 귀국하였다.

사신 일행이 국경을 넘어 의주에 도착하자, 그는 서울에 서 자신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우 박선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읽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장의 별지가 첨부되어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두 장의 편지는 《환재집》(제8권)에 〈아우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38〉이라는 제목으로 잇따라 수록되었다. (...)

첫 번째 편지에서 박규수는 중국 여행의 목적을 간단히 설명하고, 그 성과는 어떠했는지 평가하였다.

“한여름에 시작한 여행길이었네만 한겨울에 돌아가게 되었네. (…) 이번 여행은 유람이 목적은 아니었지. 중원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고자 해서 떠난 것이었네. 예전에 나와 교분을 맺은 이들은 모두 북경을 떠났더군. 오직 연초硏樵(동문환, 박규수의 친구)의 아우 문찬(청 말의 관리, 학자)만 남아 있었다네. 그런데 대혼大婚(청나라 황제 동치제의 결혼식)이 9월 15일이라, 그때까지는 중국의 조사 朝士(관리)들과 서로 어울릴 틈이 없었다네.

드디어 그날이 지나자 반차 班次(중국 조정의 공식 모임)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고, 내 이름을 듣고 객관 客館(사신의 숙소)으로 찾아와준 사람도 있었다네. 물론 다른 자리에서 교분을 맺은 이도 있었네. 적어도 한 번은 만난 사람들을 모두 헤아려보니 80여 명이었네. 이만하면 널리 교유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

사실이 그러했다. 이미 노경에 접어든 박규수가 사행 길에 나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중국의 명공거경名公巨卿(고위층)을 많이 사귀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정확히 알고 싶어 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급변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박규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옛 친구들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고, 새로 만난 젊은 관리들은 특출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우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교유한 사람은 많았으나 그저 술과 음식을 마련해 돌아가며 초대하고 농담이나 나누며 즐길 뿐이었지. 어찌 내 뜻에 맞는 일이라고 하겠는가.” (...)

북경에 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양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박규수는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유럽에 다녀온 청나라 사신 숭후의 형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담담한 필치로 서술하였다.

“경오년(고종 7년, 1870) 겨울, 천진흠차대신天津欽差大臣 숭후 崇厚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프랑스에 갔다네. 프랑스가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과 통호 通好하기를 여러 차례 주장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낸 것이라고 들었네.”

금년 여름에 사신 일행이 돌아왔다네.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法國], 독일[布國]과 미국 등을 둘러보고 왔다고 하더군. 만약 이 사람(숭후)을 만날 수만 있으면 오랑캐의 사정을 자세히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이네. 그러나 만나기 어려웠어. 그런 만남을 주선해줄 사람도 찾을 수 없었네.

숭후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와 친밀한 사람이라도 만나야겠다고 박규수는 생각했다. 그는 숭후의 주변 인물을 폭넓게 물색하였다. (...) 정말 집요한 노력이었다. 박규수는 서양에 관한 정보를 갈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처럼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겠는가. 그는 우여곡절 끝에 숭후이 형 숭실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그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숭실에게 들은 말인데, 그의 아우가 명을 받들어 프랑스에 갔을 때 그 나라 왕(나폴레옹 3세)이 독일에 포로로 잡혀갔다네. 그리하여 새 임금이 즉위하기를 기다려 천자의 명을 전하고 돌아왔다고 하네. 독일의 강성함은 서역西域보다 대단하지만 이번에는 러시아[俄羅斯]가 비밀리에 도와준 덕분에 승리하였다고 하더군. 그의 설명에는 들을 만한 것이 많았네.“

박규수는 서양 사정을 나름대로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고는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천하의 대세를 따져보면 가장 큰 근심은 러시아인 것 같네. 지금의 소용돌이는 바로 신강 新疆(현 위구르자치구)에 일이 생겼기 때문이네. 이역시 러시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되네.* 중국의 사대부들이 이 점을 늘 염려하였으나 만인滿人(만주족)은 쾌락만 좇으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네. 또 한족 선비들은 문약 文弱하여 서양을 소홀히 여기고 있어, 장차 천하의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네.“

만주족은 나태하여 믿을 수 없고, 한족 지식인은 능력도 의지도 박약하여 천하의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었다. 박규수의 귀로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장차 러시아의 남하가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러시아의 영향력이 나날이 증대하고 있어 박규수의 가슴속은 근심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중국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만한 인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조선은 장차 사상 초유의 역사적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박규수는 눈앞이 깜깜했다. (...)

※출처: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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