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 캐나다에서 해결해야 했다.

상하이 출신 중국인인 우리 가족의 가정의가 캐나다의 정신과 진료를 강력하게 추천한 것도 한몫 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최신 정신보건센터가 들어선 참이었다. 부유한 중국인이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여 지었다고 했다. 내가 경험한 캐나다의 정신과 진료 시스템은 놀라웠다. 의사의 설명은 빠르고 간결했지만 환자는 물론 가족 중 어느 누구의 말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모든 질문을 진지하게 들은 후, 근거를 제시하며 답변해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짧은 진료 시간을 보완하는 장치가 철저히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증례관리자라고 하여 간호사가 한 명 배정된다. 상태가 나빠지거나 비상사태가 생기면 증례관리자에게 24시간 연락을 취할 수 있다. 필요하면 의사와 진료 예약을 잡아주고, 환자가 신체적 질환으로 응급실을 방문하거나 의료기관을 이용할 때는 정신질환 환자와 다른 환자들 양쪽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개입하거나 응급실에 연락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해준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져 경찰을 상대해야 할 때도 공신력 있는 치료진의 대표로 환자를 보호한다.

사회사업가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아이가 집 근처에 있는 대학에 다시 다니게 되었을 때, 그는 함께 가서 학교측 장애학생 복지 담당자를 만났다. 상태를 설명하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에서 보다 많은 부분을 커버해주도록 손을 써줬으며, 수업 스케줄이나 과제, 특히 시험을 칠 때 개별적인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협상했다.

시험 때 장애인에게는 따로 공간이 마련되고 두 명의 시험 감독관이 배석한다. 시험 시간은 보통 학생들의 1.5배를 허용한다. 감독관은 감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편의를 봐주려는 것이다. 예컨대 신체적 어려움이 있다면 그로 인해 시험을 망치지 않도록 도와주고,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든지 해도 역시 불편을 겪지 않도록 배려한다. 우리나라에서 장애 학생에게 시험 시간을 1.5배 준다고 하면 아무 말도 없을까 생각해본다.

사회사업가는 일상생활도 돌봐준다. 정신질환의 급성기에는 약으로 인해 살이 많이 찌고, 대부분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환자는 외부 출입을 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사업가가 전화를 했다. 집 근처에 헬스클럽에 나와 등록을 하면 등록비를 모두 병원에서 대주고, 즉시 현금으로 1백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정신질환자들은 직업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현금이 간절히 필요하다. 물론 부모가 용돈을 넉넉히 주는 집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현금이라는 강력한 유인책을 이용하여 고립된 환자를 밖으로 끌어내고, 트레이너와 인간적 관계를 맺게 하고, 몸을 움직이고, 체중 조절을 하는 등 다양한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모든 비용은 병원에서, 즉 사회에서 지불한다.

책에서도 지적하듯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가장 편한 곳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다. 그런 자리는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마련된다. 회복된 사람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강연이 수시로 있고 월요일은 요가, 화요일은 뜨개질, 수요일은 피아노 레슨 하는 식으로 거의 매일 지역사회의 강사들이 무료 강좌를 연다. 병원 주변 대여섯 채의 집은 병원 소유다.

여기서 크리스마스 때면 환자들끼리 모여 카드를 만들고, 영양사를 초빙하여 다 같이 수퍼마켓에 가서 건강에 좋은 식품을 고르는 방법을 배우고, 요리사를 초빙하여 간단한 쿠킹 클래스를 열고 직접 끼니를 장만하는 법을 가르친다.

책에서 언급하듯 결국 정신질환자 옆에 남는 사람은 가족이다. 가족에 대한 지원과 교육의 중요성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놀랍게도 가족에게 전담 심리학자가 배정된다. 우선 부모를 불러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주고, 부정적인 감정을 돌봐주고,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조언해주었다.

다음은 형제들의 차례였다. 정신질환자에게 가족의 관심과 자원이 집중되는 데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지, 그런 질투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가족 역동에 의해 마음 속에 드리워진 그늘은 없는지 등을 상담해준다. 캐나다의 상담료는 1시간당 300달러 정도인데 가족 심리 상담은 모두 무료다.

가족 교육 기회는 너무 많아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우선 심리학자가 주관하는 가족들 간의 대화 자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마련된다. 누구나 참석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된다. 자신이 겪었던 기가 막힌 경험, 앞날에 대한 걱정, 공공 서비스 정보, 환자에 대한 지원 정보, 임상시험 정보 무엇이든 공유할 수도 있다. 누군가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면 따뜻한 위로를 넘치도록 받는다.

정신질환에 대한 정식 강좌도 상시 열린다. 가족과 보호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들, 즉 정신질환이 무엇인지, 약물치료는 어떻게 하는지, 왜 약을 끊어서는 안 되는지, 상태가 나빠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폭력적으로 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앞날을 위한 재정적 계획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독립하고자 할 경우 어떤 주거 형태를 선택해야 하는지 등 무궁무진한 내용을 가르친다.

강의를 같이 들은 사람끼리 어디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강력한 연대와 지지가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캐나다 사회에 대해 물어보면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누구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앞만 바라보고 뛰어가면서 경쟁에서 밀린 사람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회가 아니라,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모든 사람이 함께 발맞춰 앞으로 나아가고, 뒤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함께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속도에 맞추려는 사회라고.

우리의 의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의료를 마지못해 해결해야 하는 일, 싼값에 해결하면 좋은 일 정도로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어엿한 선진국이다. 사회에서 행복의 척도는 어디에 있을까?

가장 약한 사람,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불행하지 않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숙하고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의료는, 특히 장애인에 대한 의료는 싼값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돌아보고, 가장 공들여 가꿔야 할 문제가 아닐까?

/강병철(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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