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서거정에게는 아내 김씨가 최상의 친구였다. 그에게는 물론 조정에 많은 동료가 있었고 따르는 젊은 문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몸이라도 아파서 자연인으로 돌아갈 때면 그를 반기는 진정한 벗은 아내 한 사람뿐이었다(서거정, 《사가시집》, 제41권, 〈병중 病中에 밤에 읊다〉).
두세 폭 병풍 앞에 등잔불도 가물가물 침상에 기대어 앉으니 스님처럼 고독하였소.
아내와 마주 보며 정담을 주고받았지.
어느덧 두 귀밑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네.
數疊屛風一盞燈 小牀扶坐兀如僧
細君相對時相語 雙鬢刁騷雪萬層


그런 아내도 남편을 탓할 때가 있다. 관운이 좋았던 서거정이나 더러는 벼슬길에서 잠시 벗어날 때가 있었다. 그는 영락없이 가난한 시인으로 전락했다.
수입은 나날이 줄어들고 생계가 어려워지면 아내의 지청구가 없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서거정, 《사가시집》, 제30권, 〈우연히 쓰다〉).
시가 아무리 많아도 가난 구제는 못하네.
스스로도 불쌍하지, 살림살이 구질하네.
아내의 화를 견뎌야 하는 이내 모습.
詩多不救貧 自憐生事拙 長被細君嗔
서거정은 워낙 술을 좋아했다. 기꺼이 그와 술친구를 해주는 아내이긴 하였으나 남편의 지나친 애주가 건강을 상하게 할까 봐 조바심을 냈다. (...) 그러나 술을 많이 마신 서거정보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등졌다.
성종 18년(1487) 시인이 손수 정리한 시집 가운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한 편이 보인다(서거정, 《사가시집보유》, 제1권).
부부가 된 지 오십 년이 되었소만
이처럼 갑자기 사별할 줄 어찌 알았으리.
그 옛날 동방삭처럼 아내에게 고기 한 점 건네지도 못하였네.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올리던 맹광*을 다시는 못 만나겠네.
지난밤 절구통에 밥 짓는 꿈을 꾸었더니
오늘 아침 장자가 동이를 두드리는 슬픈 일을 당하고 말았네.**
낙천(백거이)도 산곡(황정견)도 나보다 일찍이
부를 짓고 시를 써 아내의 죽음을 슬퍼했네.
琴瑟相諧五十霜 那知死別亦蒼黃
無由遺肉如方朔 不復齊眉見孟光
昨夜已成炊臼夢 今朝謾作鼓盆傷
樂天山谷能先我 作賦題詩爲悼亡
* 거안제미(擧案齊眉) 고사의 주인공으로 남편을 극히 존중한 인물이다.
** 절구통에 밥 짓는 꿈은 아내를 잃는다는 뜻이며, 장자가 동이를 두드리는 일 또한 아내의 죽음을 의미한다.
서거정은 가장 진실한 벗이던 아내를 갑자기 잃고, 애타는 슬픔을 담아 애도의 시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을 손수 정리하고는 그 이듬해(1488) 타계하였다.
※출처: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