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노동브리프(Jeonbuk Labor Brief) - 칼럼
<전북의소리>는 노동계의 제반을 조사·연구하며 지역 노동문제를 시의성 있게 발굴하고 의제화하는 계간 <전북노동브리프>와 제휴해 지역 노동계 이슈에 대한 현실 진단과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글을 고정 게재한다. /편집자 주
들어가며
지방 소멸과 인구 감소가 정책 입안자들의 관심사로 부상한 2020년대 한국의 비수도권 지역에서 노동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지방 소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서울에서 마쳤고 이후 해외에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한국 사회(과)학계의 ‘서울 중심성’을 체현하고 있는 필자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다소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 글에서는 노동 연구자로서 한국의 지역 노동운동에 대한 필자의 학술적 관심과 2023년부터 약 2년간 비수도권 지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북노동정책연구원의 운영위원으로 함께 했던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한 지방의 노동 연구자와 지방의 노동연구원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한국에서 노동 연구자 되기

사회변동을 탐구하는 사회과학 분야의 학계에서는 특정 시기에 유행하는 연구 주제 혹은 분야가 존재한다. 예컨대, 1990년대 냉전이 종식되고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198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맑스주의에 관한 학술적 관심은 약화되는 반면, 포스트 모더니즘, 비판 이론, 문화 연구, 세계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노동 사회학 분야의 경우,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 많은 논문과 학술서가 쏟아져 나왔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복지국가, 시민사회, 인권/NGOs 등 비판사회학 내 다른 연구 주제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
학문 공동체가 한국의 사회 변화와 글로벌 사회 변동에 민첩하게 대응하여 새로운 연구 주제를 탐구하는 것은 학문의 실용적 가치를 높이는 측면에서 권장할 만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학계의 트랜드가 특정 주제 연구의 학문 후속세대 양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면 이는 학계와 시민사회 모두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필자가 대학원 석사과정 공부를 시작한 2000년대 중반 한국의 노동 연구자는 겉으로 보기에 이러한 학문 후속세대 재생산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보였다. 제조업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산업 노동 연구는 가치사슬 고도화를 통해 지식 기반 경제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의 사회 경제적 조건에 더이상 부합하지 않는 듯한 연구 주제가 되었고, 당시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나타났던 노동운동의 보수화 경향은 많은 진보적 연구자들이 노동을 자신의 연구 주제로 택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2006년 12월에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재생산 위기를 경험하였던 노동 연구 분야 내에서도 여러 새로운 시도가 진행되었다. 예컨대, 1990년대 후반 경제 위기를 계기로 본격화된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와 비중을 늘림으로써 노동시장에서의 불안정 노동이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사회 문제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노동자 연구는 새로운 붐을 맞이하게 되었고 노동운동을 연구하는 노동 사회학자 역시 비정규직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하였다.
또한 전국적 차원의 노동정치와 작업장 노사관계에 주목하는 기존의 연구 경향을 극복하면서 산업 전반의 가치 사슬의 변화와 노사관계에 대한 탐구가 본격화되었고 계급형성론의 시각에서 울산, 인천 등 지역 차원의 노동운동의 동학을 밝히는 사회학적 연구가 시도되었다. 또한 (이미 1990년대부터 진행되었지만) 제조업 부문의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를 벗어나 2000년대 이후 서비스 산업, 의료, 공공 부문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 역시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주제의 다양화와 질적 심화는 2010년대 후반 이후 노동 연구 분야의 신진 연구자의 양적 확대로 이어지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 연구자들의 불안정 노동에 대한 관심은 지역사회에서 불안정 노동 조직화라는 노동운동의 전략적 실천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 모두 취약한 불안정 노동자의 조직화를 위해 활동가들은 도시의 공적 공간에서 불안정 노동자 투쟁을 전개하여 이들이 경험하는 착취와 배제, 차별을 가시화하였다.
예컨대, 서울 수도권 지역 대학 청소노동자 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불안정 노동자 운동은 노학연대를 형성하였고 지역 차원에서 노조 간 연대를 강화하였다. 작업장에서 노동과 자본 간 힘의 불균형은 작업장 바깥의 지역사회에서 연대 형성을 통해 불안정 노동자의 연합적 힘의 증대를 꾀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또한 2010년대 미국의 노동자 센터와 유사한 노동권익센터가 확산되면서 지방정부 및 지역시민사회를 통한 노동권 보호 노력 역시 제도권 내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노동 연구는 작업장 노사관계라는 협소한 틀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심층 사례 연구 즉, 장소 기반의 질적 연구를 지향하였으며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노동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거시 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지역 차원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노동운동의 양상이나 미시적 사회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분석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지방의 노동운동, 지방의 노동 연구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노동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작업장과 지역사회로 포괄되는 현장 기반의 지역(local)을 연구하였다는 점에서 노동 연구와 지역 연구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런데 한국의 비수도권 지역 즉, 지방에서 노동을 연구하거나 지방의 노동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1980년대 후반 거대한 노동 소요의 분출 이후 노사관계의 제도화 과정에서 전국 수준의 거시 조합주의적 계급타협보다는 사용자와 기업별 노조 간 미시 조합주의적 계급타협이 두드러졌으며 산별노조로의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기업 혹은 작업장 수준의 노사 간 각축과 교섭이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는 지역 차원에서 노동운동의 연대 형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형성되었던 한국에서 지역 노동운동의 성과가 지노협과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 지역본부로 제도화되었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미조직,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지역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지만 조직의 중요성에 비해 자원과 역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지부, 지회, 분회가 모범적인 지역 연대 활동을 조직하는 지역 본부가 존재하지만 비수도권 지역이 직면한 일자리 위기와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마련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북노동정책연구원을 비롯한 지방의 노동 연구원은 지역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다. 『연대와 실천』이라는 저널을 발간하고 199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 및 제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영남노동운동연구소와 같은 지역 기반의 노동 연구소에서 연구자는 현장의 노동운동 활동가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연구소는 단순한 연구 용역 과제를 수행하는 기관이 아닌 노조 지도부 및 활동가와 운동의 전략을 함께 고민하는 역할을 하였고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노사관계 연구자와 노동운동 활동가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경험은 지역 노동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국 연구원과 지역 노동운동 간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지역의 노동 연구자 집단을 새롭게 형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지역 노동운동의 발전과 지역 노동 연구의 역량 강화는 상호 보완적임을 시사한다. 비록 광역지방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 재정 자립도는 낮지만 전북노동정책연구원의 경우 전임 연구 인력을 채용하고 보고서와 뉴스레터를 꾸준히 발간하며 노조의 수탁 연구를 수행하는 등 단기간에 지방 노동 연구기관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연구 과제 수행 이외에도 지역에서 노동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재생산을 위한 연구 공모전을 추진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년여간 전북노동정책연구원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연구소 활동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입장에서 향후 연구원의 발전을 위해 두 가지 고민할 지점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역 노동 연구와 관련된 연구 인력의 충원과 재생산, 연구 역량 확대 및 전문성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재 연구원에는 대학원에서 사회학, 경영학 등 노사관계 관련 분야를 전공한 전임 연구원 두 분이 일하고 계시지만 함께 연구를 수행할 연구보조원이 부재한 실정이다. 연구 프로젝트에 결합할 수 있는 인력 풀(pool)을 형성하기 위해 전북대를 비롯한 지역 대학의 대학원생 연구자들과의 학술 교류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지역 노동 연구원과 현장 노동운동의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연구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새로운 지역 노동 연구자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요청된다. 연구원이 수행하는 노조의 용역 과제에서는 많은 경우 인터뷰 섭외나 설문조사에서 연구자들이 노조 활동가가 함께 과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합류한 연구자들이 질적 방법론 기반의 현장 연구에 대한 경험을 쌓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객원 연구원 제도의 확대를 통해 연구자 집단을 형성하고 지역-노동 연구의 의제를 연구자와 노동운동 활동가가 함께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매년 연구원이 (가칭) ‘지역 청년 연구자-노동운동 활동가 대회’를 개최하여 연구자와 지역 활동가 간의 접점을 마련하고 비수도권 지역의 산업위기-지방소멸-인구감소 문제에 진보적 의제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비수도권 지역에서 노동 연구자로서 활동하는 의미와 지방 노동 연구원의 역할을 성찰하고 그 발전 방향을 간략히 모색하였다. 한국 사회의 노동 연구는 과거의 학문적 재생산 위기를 극복하고 불안정 노동과 지역사회 조직화에 대한 관심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혀 왔지만 현장에 기반을 둔 지역 차원의 노동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전북노동정책연구원과 같은 지방의 노동 연구원은 지역 노동운동의 위기 대응 전략을 수립하고 현장과 연계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그 잠재력을 증명하고 있다. 향후 지역 노동 연구의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 노동운동의 발전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지역 대학원생과의 학술 교류를 통한 연구 인력의 충원과 재생산에 힘쓰고, 현장 활동가와 연구자가 함께 지역-노동 연구의 의제를 형성할 수 있는 네트워크 구축에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비록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필자 역시 노동 연구자로서 앞으로 비수도권 지역의 노동 연구원의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자 한다.
/강민형(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위 글은 <전북노동브리프> '2025년 가을호'에도 게재됐으며 <전북의소리> 보도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