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론
조선시대 지역 향반이나 토호들이 수령과 밀착하여 부당한 판결 등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상피제도'였다. 4촌까지 적용됐던 이 제도는 이방승지·이조관원·병방승지·병조관원의 상피를 규정했고, 병조·도총부당상관·겸사복장·내금위장·오위장에는 같은 관청이 아니라도 적용됐다.
그러나 토호세력이 점점 비대해지면서 유혹과 밀착·결탁은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이어져 오며 부당한 판결 또한 오랜 세월 계속 유지됐다. 오늘날 토호세력과의 유착, 전관예우 등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도 이런 현상의 연장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지역 사정에 밝은 해당 지역 출신 법관들이 재판을 하게 함으로써 판결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며 지역 법관을 임명한 '향판제(鄕判制)'는 그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지역 출신 법관들이 재판하는 ‘향판제’…'신뢰도' 높이기는 커녕 지역 인사들과 '유착·병폐' 잇따라

‘향판제’는 ‘향토 판사 제도’의 줄임말로 전국 법원에서 순환 근무하지 않고 지방 관할 법원 중 한 곳에 부임하여 퇴임할 때까지 근무하는 법관제를 일컫는다. 이러한 향판제는 지난 2004년 대다수 법관이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기 때문에 인사 이동이 잦아져 재판이 부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도입됐다.
전보 제한 기간은 10년, 전보 범위 지역은 각 고등법원 관할 내로 하는 것으로 정착됐으나 지역 사정에 밝은 해당 지역 출신 법관들이 재판을 함으로써 판결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는 당초 기대와는 달리 지역 인사들과의 유착이 심화되면서 많은 병폐를 낳았다.
지역 출신이다보니 같은 지역 또는 동문 등의 인맥을 통해 연결고리가 형성되며 부당한 판결을 내린 경우가 속출했다. 특히 2010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황제 노역' 논란 과정에서 향판이 지역 토호와 유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폐지됐지만 그 후에도 향판은 곳곳에서 다시 부활했다. 사법부의 폐쇄성과 엘리트 인맥 구조에 대한 불신을 키운 향판제는 지역 유력자나 친인척, 동문 등과의 유착 때문에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아 왔다.
향판이 지역 유지나 피고인과의 사적 인맥을 통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란이 반복되자 사법부는 2016년 이후 '향판 배제 원칙'을 도입하고 전국 법관 순환 근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한 바 있다. 하지만 ‘향판의 부활을 부정적으로 몰기보다 부작용 방지에 힘써야 한다'는 말이 법조계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그 폐해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통속관계 중시, 토호세력과 유착, 전관예우 활개치며 '법질서' 어지럽혀...'향판제' 폐지론 비등 이유

특히 토호세력과 유착하거나 전관예우를 중시하는 등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는 일부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지역으로 확산돼 향판제 폐지론이 법조계 내부에서도 들끓을 정도였다. 향판제가 지역사회의 정의와 공정 수호를 깡그리 내팽개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거센 비판 여론과 내부 자성으로 피해 사례가 다소 줄었다고 하지만 지역에선 여전히 지금도 조삼모사(朝三暮四)식으로 대처하거나 시간을 질질 끌며 통속관계(統屬關係)를 중시하며 부당한 판결로 이어지는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고개를 내밀며 법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법관 증원, 대법관 추천위원회 구성 다양화, 법관 평가제 개선을 통한 인사 시스템 개편, 하급심 판결문 공개 확대, 압수수색영장 사전 심문제 도입 등을 뼈대로 한 사법개혁 논의가 한창이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고혈 같은 향판제 개선이 요원하다는 볼멘 소리가 계속 나온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전북지역에서 최근 다시 불거져 향판제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뇌물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전주지방법원 현직 부장판사를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이고 나서 충격과 파장이 크다.
특히 공수처 출범 이후 법원이 압수수색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지방법원의 불신과 공정성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동안 지역 출신이거나 장기간 지역에 거주했던 판사들이 토호세력, 친인척, 동문 등과의 유착 때문에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아 왔던 터라 불신과 우려가 높다.
전주지법 현직 부장판사, 고교 동문 변호사로부터 금품 받은 혐의 '압수수색'…초유의 일 ‘우려’

해당 부장판사는 고교 동문인 도내 로펌 변호사에게 현금 300만원과 아들 돌반지, 배우자 향수 등 370만원 상당을 받은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 등이 주주로 있는 회사가 소유한 건물을 판사 아내가 무상으로 음악 교습소 용도 등으로 쓴 의혹도 받고 있다고 하니 유착과 밀착의 통속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사건은 지난 4월부터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해당 판사는 의혹이 불거지자 "아내가 변호사의 아들에게 교습해주고 그 레슨비를 받은 것"이라며 "재판 등 직무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늦게 나마 공수처가 법원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진행했지만 이번이 첫 사례라고 하는 점 또한 심상치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판사와 변호사가 서로 잘 아는 고교 동문 사이란 점이 석연치 않다.
그동안 줄곧 병폐 원인으로 제기돼 온 향판제의 고질적인 지연·학연 등 연고주의 습속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확대되면서 거센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판국에 폐지됐는가 싶었던 향판제의 부활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하고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 때문에 이번 공수처의 수사 결과를 끝까지 주시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부디 '고름' 같은 향판제의 부활이 아니길 바란다.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