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134)

지리산이 사람살이를 가로 막았다. 동과 서로 말이다. 먼 옛날 그 터전에 살던 사람들은 영호남이 되었고 우리로 살던 그때를 지나면서 조선의 나라에 들어 역사와 문화에서 너와 나인 따로의 마음 색깔을 내며 살아왔다. 까막득한 시절 우리로부터 진화해온 동서 영호남 갈등의 씨앗은 어디에서 최초로 싹이 텄을까?
602년 8월에 백제 무왕은 지리산 아막성을 포위했다. 신라는 아막성을 구원하기 위해 수천 명의 기병을 급파하여 백제군을 격퇴시키고는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여 아막성의 방어망을 단단히 구축했다. 이후 백제를 역공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에 나서 신라군은 아막성에서 운봉으로 진격하여 백제의 4만 대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후 철수하려고 하던 신라군은 백제의 군사작전에 휘말려 백제군의 역습을 받아 대규모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신라 장군인 무은(武殷)이 포위당하자, 무은의 아들인 귀산(貴山)이 동료인 추항(箒項)과 함께 나서 분투하였다. 신라군은 분개했고 군사들의 사기는 승기를 잡았으니 아막성에서 백제의 4만 대군에 맞서 승리하였다. 그 전투에서 승화한 신라, 백제군과 아영가야 백성들의 영혼은 한자리에 들어 고이 잠이 들었다.

동서 사람들의 영혼이 적에서 이제 우리의 영혼으로 아막성 한자리에 고이 담들고 계신 것이다. 1,500년 후의 후손들인 우리는 그곳에서 손잡고 향을 올리며 같은 땅에서 살아온 조상들에게 엎드려 위령제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영호남이 아닌 우리가 되어 역사값, 문화값, 조상값, 나라값을 하는 일일테니 말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 올려드릴 위령제에 영호남을 모으고 그 가운데에 서야 할 사람들은 지리산 남원 아막성 고을 사람들이다. 먼 옛날 이래로 동서 영호남의 소통체 아막성의 주인이 아영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 갈등도 많고 싸움도 많다.
너 아니면 나이고 우리라는 것은 때로 받아야 하는 선물이다. 그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에서 나왔다. 저쪽 사람들과 이쪽 사람들 그것이 동서가 되었고 영호남이 되었다. 아주 오랜 옛날 이쪽 저쪽 사람들이 서로 우리였던 시절은 가야때다.
부족 형태의 모듬 살이가 듬성듬성 이쪽 저쪽에 자리하고 서로는 물물도 교환하고 도우며 살았으니 네땅 내땅 네것 내것은 우리 땅 우리 것이라는 공동체의 울타리에 들었다. 크고 작은 모듬 살이들이 욕심을 키우면서 싸움이 일어났고 네땅 내땅, 네것 내것에 목숨을 내었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크고 작은 나라가 생겨났다. 1,500년 전 그 싸움터가 지리산 가야 아영땅 아막성이다. 좌로는 신라, 우로는 백제의 나라에 끼인 아막성을 가진 가야 아영국은 동서와 영호남의 소통로요, 소통체였다.
아영 가야가 나라로 커져가려하고 있을 때 이미 큰 나라였던 신라와 백제는 서로 침공을 하기 일쑤였고 그사이에 끼여있던 아영 가야는 두나라의 길목에서 운명이 엇갈려야 했다. 아막성은 한때 신라, 한때는 백제가 되어 동서의 소통로가 되었고 존재로 소통체였으니 영호남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막성은 한조상이 한자리에 잠든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터전이리라.
동서 영호남이 지리산 아막성에서 손잡고 '야호' 하면 통일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재명 정부는 동서화합의 실천 시책으로 아막성 부근에 백제·신라군의 전몰 위령공원을 만들고 동서 화합탑을 세워 문화민족 공동체를 실현하게 하소서.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