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85)

가끔 충무공 이순신 같은 사람이 조선의 왕이었더라면 하고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이순신 리더십에 이끌린 필자는 인간 이순신이 매일 하늘에 기도하면서 간절히 천명을 묻던 척자점(간이주역점)과 이재 황윤석의 주역점 비교 소논문을 쓴 적이 있다. 알면 알수록 이순신은 존경할 수 밖에 없는 큰 사람이고, 세계 전쟁사에 다시 나올 수 없을 불멸의 전적인 23전 23승을 최악 조건에서도 거둔 하늘이 내린 명장이다.

임진왜란 하면 흔히, 이순신, 유성룡, 곽재우, 김천일, 서산대사, 사명당 등의 이름이 우선 떠오른다. 그러나 이들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이 전쟁 지도자들이 영웅이 될수 있게 만든 막후 인물이 바로 당시에 우의정 겸 도체찰사(전시총사령관)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이다. 이원익 연구가인 권기석 박사는 한마디로 "출장입상(出將入相, 전선에 나가서는 장수,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 역할을 하는 전천후 인재)이라는 말 그대로 선조의 곁에 있을 때는 여러 방략을 제시한 재상이었지만, 조정을 떠나 현장에 가면 전투지휘와 병력과 군량을 모집한 장수였다. 이렇게 일인 다역을 고루 수행하여 끝내 전란을 승전으로 이끈 인물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드물다."고 평가했다.

선조 임금마저도 "조선에는 오직 오리 한 사람이 있을뿐"이라고 그를 무한 신뢰했다. 그러한 왕의 신임과 정의감이 있었기에, 홀로 버텨내서 기어이 이순신의 목숨을 살렸으리라. 유성룡이 사람보는 안목으로 이순신과 이원익을 발탁하고 특별승진시켜 사령관 자리에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선조와 원균의 질투와 왜군의 이간질 계책으로 죽일뻔한 이순신을 이원익이 홀로 살려낸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죽었다 살아난 이순신이 명량대첩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건졌다. 이순신의 명량대첩 일기처럼 실로 하늘이 도우신 천행(天幸)이었다.

고창군 대산면에는 산은 낮으나 뜻이 우람한 장자산(將子山)이 있다. 그래서 이 일대가 조선시대 무장현 장자산면이었다. 현재 대산大山면 지명은 통합하면서 대제면과 대사동면의 대大자와 장자산면의 산山자를 결합한 이름이다. 얼마전까지 고창군의 최남단 학교인 장자국민학교가 있었고, 인근에 대장동이 있는 것도 장자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왜 96미터 높이의 나지막한 뒷동산을 장자산이라 큰 이름을 붙였을까? 고창군 4대명당으로 꼽힌다는 '출장입상형' 대명당이 있다는 예언 덕분이다. 이곳에는 고인돌 시대부터 있었던 장자산 천제단이 잘 남아 있어서 성스런 산임을 알려준다.

무장읍성에서 의기투합한 두 영웅의 공심 소통

이순신과 이원익이 고창의 무장객사에서 만나 동침한 날이 1596년 9월 15일이다. 충무공이 사지에서 백의종군후 다시 통제사로 복귀한 후 기적같은 명량대첩(1597. 9. 16)을 거둔 꼭 1년전이다. 왜군들이 이름만 들어도 떨었다는 삼도수군통제사(해군총사령관) 이순신을 이간질시켜 제거해버린다. 후임 원균으로 사람하나 바뀌자마자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세계최강 조선수군은 궤멸하고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난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오리집>을 아울러 살펴보면, 정유재란 1년 전인 1596년 여름부터 도체찰사 이원익과 통제사 이순신은 서남해안 전투준비태세 현장점검 순시에 나섰다. 이순신은 1596년 9월 12일부터 4박을 무장객사에서 묵었다.

9월 15일 합류한 이원익과 무장객사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함께 동침한다. 오직 백성을 기르고 나라를 지키려는 맑은 영혼을 가진 두 영웅이 우국공심을 나누던 무장객사의 하룻밤 인연이, 아마도 이순신을 살렸으리라. 삼남지역 전투준비 상황점검을 마친 이원익은 곧바로 상경하여, 10월 5일 선조를 만나 상세한 정세보고를 한 기사의 행간을 보면 짐작된다. 마음속으로는 이순신을 원균으로 바꿔치기 하고 싶은 질투왕 선조가 이순신이 근무 잘 하더냐고 묻는다.

이원익이 대답하기를, "이순신은 우직하여 힘써 복무하고 있을 뿐더러 한산도에 군량을 많이 비축하였다고 합니다."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닌지라 다시 선조가 유도심문하기를, "이순신이 처음엔 왜적을 열심히 잡았는데 그후에는 태만하다고 하던데 사람됨이 어떠한가?" 다시 캐물었다. 이원익은 "수많은 장수중 가장 쟁쟁한 자이고, 그가 태만하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경상도 모든 장수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훌륭하다"고 시종일관 그를 변호한다.(선조실록 1596.10.5)

조선시대 호남우도의 서해 방어체계는 나주목을 지휘부로 무안 함평 영광 무장 고창 흥덕 입암산성을 잇는 방어축선이었다. 이순신의 무장현 방문 전후의 행적을 살펴 보아도 나주진관체제와 일치한다. 9월 6일 나주출발 무안숙박, 7일 다경포에서 영광군수 면담, 8일 임치진, 9, 10일 함평 2박, 11일 영광 1박, 12일 저녁 무장도착, 13일 이중익과 이광보와 담화, 형편이 궁색하다 하여 입던 옷을 벗어 주다. 15일 무장현에 도착한 이원익과 인사후 대책을 의논하다. 16일 이원익과 동행 고창출발 장성도착, 17일 이원익은 입암산성으로, 이순신은 따로 진원현으로 순시일정을 계속한다. 서남해안 순시일정중 무장읍성에서 이순신이 가장 오랫동안 유숙한 점과 이원익과 합류지를 무장으로 정한 점을 보면, 그만큼 무장현의 동원능력을 말해주는 한 사례일 것이다.

되살아난 호남 방어의 요충 '무장읍성'

무장읍성이 조선시대 방어전략상 요충이었음은 축성시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새로운 국가 건설로 아직 혼란했을 조선 건국직후 25년만인 태종17년 1417년에 최초의 지방계획도시로 설계된 무장읍성이다. 무장객사와 관아, 읍성과 7거리당산 등이 지형에 따라 풍수원리에 맞게 계획적으로 입지한 것이다. 단종원년인 1453년에 뒤늦게 축조한 고창읍성 보다도 36년이나 먼저 쌓은 것이다.

임진왜란의 삼대첩에서 무장 출신 의병장의 활약상을 보아도 고창이 의향임과 무장현의 중요도를 읽을 수 있다. 진주성 2차혈전시 순국한 무장현감 출신 강릉유씨 유한량 의병장, 행주대첩에 군량미를 보내고 참전한 청도김씨 김응룡 의병장,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지원한 함양오씨 오익창 의병장 등이 모두 무장현 출신이었다. 2003년 기본계획수립 이후, 2018년 11월 거의 20여 년에 걸친 무장읍성 복원사업 마무리단계인 무기고 주변 발굴조사 과정에서, 조선시대 무기발굴사상 최대규모의 보물급 유산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 최첨단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가 폭약과 뇌관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로 11발이나 무더기 출토되었다.

최첨단 무기를 대량 비축한 점도 무장읍성의 중요도를 말해준다. 특히 무장현감(1571년) 출신 유한량과 함께 진주성 혈전에서 순절한 최경회 의병장도 무장현감(1579년) 출신이다. 곤궁한 처지의 자신을 살려준 남편에게 의리를 지키려고, 진주성 의암에서 왜장을 익사시킨 주논개 의부인(義夫人)의 부군이 바로 최경회다. 화순출신 최경회 장수현감은 곤궁에 처한 양반출신 주논개 모녀의 목숨을 구해주고 사노비형태로 부양한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부임시에도 모녀를 데리고 왔다. 죽을 고비에 있던 주논개 모녀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살려낸 무장현감 출신 최경회 의병장은 공심을 지닌 목민관이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풍전등화 같은 조선을 살린 것은 이름없는 수많은 의병들과 이들을 이끈 소수의 의인이다. 임진왜란 직전 사당(私黨)을 지어, 정여립난이란 빌미로 조선인재 1천여명을 죽여버렸다. 정적을 죽이려다 나라를 죽일뻔했다. 의인을 알아보는 안목, 지인지감(知人之感)을 지닌 의인들이 그나마 있어서, 나라의 목숨줄을 이엇다. 율곡 이이, 이원익, 이순신, 유성룡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임진왜란 직전 6계급을 특별승진시켜, 전라좌수사에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이 유성룡이다. 조선역사상 최초로 평양감사를 우의정겸 총사령관까지 비약 승진토록 추천한 사람도 유성룡이다. 전쟁시에 적재인 이순신과 이원익이 적소인 사령관 지휘봉을 잡았기에 조선이 겨우 살아남은 것이다.

사람에 달렸다...나라도 고을도 미래도

이원익이 초급 관료시절 황해도 도사로서 병적부를 탁월하게 정리하는 것을 보고, 그를 발탁한 이는 황해도 감사이던 율곡 이이였다. 율곡은 이원익이 재상 재목임을 알아보고, 재상들의 필수보직인 홍문관 관리로 추천했다.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인 지인지감은 리더의 필수요건이다. 이 안목은 사심이 없이 공심으로 보아야만 생긴다. 돈으로 빽으로 공천장 사서 의원하고 군수하는 사람들 눈에, 돈없고 빽없는 유능한 공직자들이 보이기나 하겠는가? 이원익은 현장순시차 전선에 내려와 진주성에서 이순신과 첫 만남을 갖고 대책을 의논했다.1595년 8월 23일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군사상황은 하나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원익의 사람됨과 공공심에 반했음을 적었다.

"체찰사를 만나보니 차분하게 하시는 말씀 가운데 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뜻이 많았다.(徃體察䖏 則從容言語間多有爲民除疾之意)" 공심을 지닌 두 장수가 공심으로 의기투합한 첫 장면이다. 우리 전북에서 아름다운 지인지감 사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임수진 전 진안군수 이야기도 회자된다. 거센 황색바람 속에서도 호남유일의 무소속 도의원에 당선된 임수진의 지역 농촌문제에 대한 진정성을 주목한 노무현 지방자치 실무연구소장은 임수진을 이사로 모시고 동지가 된다. 뒤에 진안군수가 된 임수진은 찬밥신세이던 노무현 부부를 자주 전북에 초청하여 모시면서, 지방자치, 농업농촌 문제를 의논한다. 일찍이 농림부장관 재목으로 임수진을 점찍은 노무현 대통령은 장관보임이 여의치않자 농촌공사 사장으로 발탁했다 한다.

또 선거판이 벌어졌다. 공심으로 일할 의인을 뽑아야만 나라가 산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거짓말에 속아 잠바 색깔만 보고 찍었다가 나라와 고을을 망치고 있다. 세상천지에 사람 속을 아는 게 가장 힘든 일이다. 이순신이 첫 만남에서 이원익의 말을 조용히 듣고 그의 공심을 읽었듯이, 말을 잘 새겨보면 그 사람 속이 보인다. 사서삼경중 인간관계를 대화체로 가장 잘 표현한 고전이 <논어>다. 논어의 마지막 구절도 사람 알아보기로 끝난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으며ᆢ 말을 살피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느니라(不知言 無以知人也)" 이원익의 말을 빌려 보아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아는 것이 처음과 끝이다. 천하의 일이나 국가의 일은 다만 공이냐 사냐 하는 오직 두 글자에 달렸을 뿐이다. 사당(私黨)이 되면 나라 일은 끝장이다."

오직 공심으로 나라를 살릴 진짜 공당의 공심을 지닌 후보를 잘 가려내서 국운이 무궁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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