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시론

새만금 방조제 전경.
새만금 방조제 전경.

프랑스 소설가인 '빌리에 드 릴라당'(Auguste de Villiers de L'Isle-Adam)이 쓴 단편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La torture par l'esperance)은 희망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심도 있게 일러주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희망고문’이란 표현의 원조격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스페인의 한 감옥으로, 주인공인 유대인 ‘랍비 알폰소 바우데르마르’는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절망과 두려움, 괴로움을 당하며 희망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다가 탈출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발견한 희미한 탈출구는 조금 열려 있는 감옥의 문이었다. 그 탈출구에서 그는 영어의 몸이 아닌 자유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드디어 주인공은 탈출구를 빠져나와 탈출에 성공했다. 꿈처럼 기뻐한 그의 기쁨은 그러나 잠시 뿐, 누군가 등 뒤에서 ‘가련하다’고 말하며 자신을 붙잡고 만다. 그를 붙잡은 사람은 바로 감옥의 책임자인 소장이었다. 그러자 이 때 주인공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 운명의 저녁은 미리 준비된 고문이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이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은 위안 이상의 것이지만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고문이 될 수도 있음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희망으로 쓰고, 결과는 현실을 왜곡하며 절망에 빠져들게 하는 사례들을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공약' 가면 쓰고 나타나는

‘희망고문’

공중에서 본 새만금 남북도로(다리가 보이는 곳)와 동서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의 모습.(사진=새만금개발청 제공)
공중에서 본 새만금 남북도로(다리가 보이는 곳)와 동서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의 모습.(사진=새만금개발청 제공)

어떻게 해도 절망적인 결과만이 기다리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진 작은 희망으로 인해 오히려 더 괴롭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희망고문이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공약'이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특히 전북은 30년 넘게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늘 변함 없이 등장하는 공약의 단골 메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새만금 개발 공약'이다. 광활한 새만금 개발사업의 정체 모를 ‘공기(工期)’는 신기루 같지만 선거 때만 되면 금세 완공될 것처럼 요란하게 포장되곤 한다.

하지만 완공은 늘, 여전히 안갯속에 가려져 있기만 하다. '미지의 새만금 개발'은 대선 공약에 올려진 후 대통령이 무려 8명이나 바뀌었다. 최근 조기대선으로 9번째 맞이할 차례다. 하지만 전북 표심을 붙잡기 위한 대선 후보들의 공약 1순위에서 새만금은 예나 지금이나 빠지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 호남지역 대선 경선 후보 합동연설회를 앞두고 전북을 방문한 이재명 후보는 새만금 해수유통을 통한 생태계 복원을 발빠르게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후보는 “새만금 해수유통을 확대해 생태계를 복원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력발전소 건설도 검토하겠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대선 결과에 따라서는 새만금 개발 계획의 대폭 수정 가능성을 예고한 대목이다. 

그동안 해수유통 확대 여부는 관련 기관과 부처 간 쟁점으로 꼽혀 왔다. 환경단체 등은 수질 악화로 인해 해수유통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전북자치도 등은 해수유통 확대 시 수위 상승으로 인한 내부 개발 지연과 비용 증대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새만금을 직접 방문한 이 후보는 또 “탄소국경조정세(CBAM)의 도입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화석연료에 기반한 제품은 국제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며 “잃어버린 3년을 반드시 보상하고, 더욱 빠른 속도로 재생에너지 사회로 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관련 분야 사업을 공약에 포함시켰다. 일부 환경단체는 적극 반기는 분위기지만 공약이 끝까지 이행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신재생 에너지 메카 조성’, 정권 바뀌자마자 ‘비리 온상’ 취급…

고강도 감사·수사로 ‘철퇴’

새만금 육상 태양광 조감도.(사진=새만금개발청 제공)
새만금 육상 태양광 조감도.(사진=새만금개발청 제공)

과거 문재인 정부 때도 새만금 일대를 '신재생 에너지 메카'로 육성한다는 공약과 함께 대대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는 듯했지만 부처·기관들 간에 협업이 터덕거리며 진척은 별로 보이질 않았다. 당시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 선포식’을 갖고 국비와 민간자본 등 10조원 넘게 투입해 원자력발전소 4기 용량(4GW) 규모의 태양광·풍력단지 등을 조성한다는 야심찬 선언과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구축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공언으로 새만금을 뜨겁게 달궜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되레 철퇴를 맞고 쇠퇴한 양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권의 바통을 이어 받은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새만금 메가시티 조성, 새만금 국제공항 조기 착공 등 새만금 관련 공약들을 그럴싸하게 제시했지만 ‘빌 공'자 '공약(空約)'에 불과했다. 실체 없는 공약이 돼버린 채 오히려 태양광 분야의 고강도 감사와 검찰 수사 등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나서 새만금의 신재생 에너지는 마치 '비리의 온상'처럼 취급돼 철퇴를 맞았다. 더 이상 ‘신재생 에너지 메카’라는 말은 꺼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분위기가 뒤바뀌고 말았다.

게다가 대통령 직속 새만금특별위원회를 설치해 새만금 주요 기반시설을 오는 2028년에 모두 마무리하겠다고 공언했으면서도 대통령이 초유의 내란 사태를 일으켜 탄핵과 파면을 자초하면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해 새만금 관련 공약들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새만금에 던져진 무수한 공약들…

안갯속으로

새만금 해창갯벌에 세워진 새만금지킴이 장승들.(사진=녹색연합 제공)
새만금 해창갯벌에 세워진 새만금지킴이 장승들.(사진=녹색연합 제공)

그러더니 조기대선 국면을 맞아 민주당 대선 주자들은 다시 새만금 신재생 에너지 등을 주된 공약으로 쏘아올린 모양새다. 희망고문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새만금에 대한 역대 정부의 희망고문은 ‘단군 이래 최대 간척사업이자 최대 국책사업’으로 불리며 1991년 11월 첫 삽을 뜬 이후 지속됐다. 그후 34년이 지났지만 썩은 담수호와 넘실대는 바다 한 가운데를 금 그어 놓은 듯한 긴 방파제만 덩그러니 놓였을 뿐, 광적인 개발주의자들과 영토 관할권 다툼에 여념이 없는 인근 지자체장들, 그리고 해당 지방의원들, 선거철마다 외치는 정치인들의 ‘조기 완공’은 여전히 요란하고 공허할 뿐이다. 

대선 후보들마다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새만금에 던져진 무수한 공약들 중 완결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2년 전 새만금에서 열린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새만금잼버리)는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려 국제적 망신과 조롱거리가 됐지만 책임은 커녕 사과나 반성도 없는 가운데 좌절과 절망은 오롯이 전북도민들 몫으로 남아있다.

‘새만금에 잼버리를 유치함으로써 전북에 7조원 이상의 엄청난 유무형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송하진 전 전북지사의 2017년 공식 기자회견 이후 국제행사 준비가 본격 시작된 새만금잼버리는 6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23년 8월 개막과 동시에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려 희망고문에 그치고 말았다. 6년여 동안 기자들은 물론 도민들 앞에서 늘 '성공 개최'를 호언했던 당시 전북의 행정 수장은 지금껏 한마디 사과조차 없다.

새만금잼버리 참담한 실패…

책임·사과 대신 ‘여론 호도’로 '추한 민낯’ 드러내

새만금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들이 수돗가에서 물을 적시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사진=세계스카우트연맹 제공)
새만금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들이 수돗가에서 물을 적시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사진=세계스카우트연맹 제공)

전북은 물론 대한민국 신인도를 나락으로 추락시킨 동시에 국제적 망신까지 톡톡히 당해야만 했던 새만금잼버리 실패는 시기와 장소 선택의 신중하지 못한 결정은 물론 충분한 기간이 있었음에도 안일한 준비와 부실한 관리·대응이 총체적으로 문제점을 드러내며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주의와 탁상행정으로 인한 '예견된 실패'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감사원은 2023년 8월 새만금잼버리가 실패로 막을 내리며 책임론이 부각되자 그해 9월 18일부터 11월 17일까지 2개월에 걸쳐 새만금잼버리 추진 실태 감사를 위한 현지 감사에 돌입한다고 밝혔지만 책임론이 정치권으로 튀어 정쟁이 격화되자 광범위한 감사를 장기간 벌인 결과라며 무려 1년 7개월만에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러자 이번엔 행정과 정치권이 앞다투어 ‘과도한 책임론에서 자유롭게 됐다’며 여론을 호도하는 '추한 민낯'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분노와 좌절, 절망과 슬픔을 안겨준 희망고문 사례는 유독 '미래의 땅', '새로운 금만평야(호남평야)'로 불리는 새만금에 넘쳐난다. 희망이 아예 없다면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깔끔히 손을 뗄 수 있겠지만 약간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절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려는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 바로 희망고문 아니던가. 

후보나 정당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또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새만금을 앞세워 애꿎은 전북도민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희망고문이라면 더는 절대 있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하거나 절망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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