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구의 '생각 줍기'

꽃이 피는 걸 시샘하며 불청객으로 찾아왔던 꽃샘추위가 물러가자 봄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에게는 진분홍 그리움의 꽃으로 잘 알려진 진달래가 드디어 꽃망울을 터트리며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으니 금방이라도 진달래가 이땅의 온 산을 곱게곱게 물들이며 만개할 거 같습니다.

우리민족이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봄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진달래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진달래가 산과 들을 진분홍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면 시나 노래로 그리움을 표현하거나 때로는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거 같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최초로 진달래꽃이 등장한 것은 신라시대의 우리 고유 시가(詩歌)인 향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헌화가(獻花歌)’라는 신라의 향가에 보면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며 가는 길에 동해안에서 수로부인이 산기슭 위에 핀 꽃을 꺾어주기를 부탁하자 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꺾어서 바쳤다는 꽃도 바로 진달래였습니다.

또한 ‘도솔가(兜率歌)’라는 향가에는 하늘에 해가 두 개가 뜨는 일이 벌어지자, 물론 여기서 해는 임금을 상징하며, 해가 두 개라는 말은 정치권력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하는 거 같습니다. 그러자 천문을 담당하던 신하가 임금에게 “스님으로 하여금 꽃을 뿌리게 하며 정성을 들이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간언을 하자,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승려 ‘월명사’에게 축문을 지어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스님이 뿌린 꽃도 ‘진달래’였습니다.

당시 진달래를 뿌리면서 공덕을 들였던 ‘산화공덕(散花功德)’의 정서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는 시에서는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봄날의 그리움을 달래기에는 소월 선생의 ‘진달래꽃’이란 시만큼 좋은 벗이 없을 거 같습니다. 학창시절 교과서 실린 시라 그런지 소월 선생의 대표작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이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사랑하는 님이 떠난다는데 울며불며 매달리지도 않고 오히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고 하고 거기에 더해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려 드리오리다”라는 표현은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으면 이렇게 반어적으로 표현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진달래꽃'이란 시를 우리 민족적 정서인 ‘한(恨)’을 가장 잘 표현한 시라고 칭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소월 선생의 시 진달래꽃은 '시'라는 문학 장르가 사랑을 받았던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처럼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외면하는 시대에도 수차례(8회)에 걸쳐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지나간 과거 추억의 흔적들을 찾아 떠나봅니다.

먼저, 진달래꽃은 1958년 최초로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만들어 가수 박재란 씨가 불러 크게 히트를 했다는데 유감스럽게도 당시 만들었던 가요 ‘진달래꽃’의 음반은 물론 악보와 음원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는 1968년 소월 선생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던 작곡가 서영은 선생이 작곡하여 만든 곡을 민요가수 최정자 씨에게 부르게 했는데 간드러진 목소리 때문에 소월 선생의 이별의 정한(情恨)을 아주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답니다.

세 번째로는 1969년에 가수 최정자 씨가 히트한 진달래꽃을 리메이크하여 가수 양혜자 씨에게 부르게 했는데 이번에는 여가수의 잔잔한 목소가 이별의 한(恨)을 애틋하게 표현하여 아주 돋보였다고 합니다. 네 번째로는 1987년 작곡가 김동진 씨가 가곡으로 만들어 가수 정수라 씨에게 부르게 했는데 ‘진달래꽃’을 가곡으로 불렀으니 좀 특이했을 겁니다.

다섯 번째로는 1990년 작곡가 정옥현 씨가 ‘진달래꽃’을 가요로 만들어 목소리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성격의 가수 신효범 씨에 부르게 했는데 임을 잊지 못하는 시인의 애절한 심정을 멋지게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섯 번째로는 2000년 작곡가 김진표 씨가 ‘진달래꽃’ 곡을 만들어 헤비메탈과 하드록을 하는 그룹사운드 ‘노바소닉’에게 부르게 했는데 노래가사가 시의 원본과 달리 많이 변형시켰다는데 시대가 변하고 노래의 유형도 변하니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일곱 번째로는 2003년에 발표된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우지민 작곡, 마야 노래의 ‘진달래꽃’입니다. 보컬 가수 마야 씨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풍부한 감성 그리고 다이나믹한 라이브 무대 매너로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덟 번째로는 2012년 어느 대학 교수님이 우리의 고대 가요집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복원집을 발간하면서 고려가요 ‘가시리’ 악보에 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붙인 것입니다. 슬픈 우리의 고대 가요 ‘가시리’ 악보에 시를 붙였으니 이별의 슬픔을 잘 표현했을 거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월 선생의 시 진달래꽃을 가지고 만들진 않았지만 이홍렬 선생의 가곡 ‘바위고개’의 가사에는 “♪♪ 바위 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 ♪♬”로 진달래는 우리의 슬픈 한(恨)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1년도에는 가수 정훈희 씨가 부른 ‘꽃길’이란 노래에서는 “♪♪ 진달래 피고 새가 울 면은 두고두고 그리운 사랑 ~ ♪♬”이라는 곡조가 경쾌하기는 하지만 노랫말로 님에 대한 그리움을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맞이하는 봄이라 그런지 진달래를 바라보며 우리 고유의 시가(詩歌)로부터 소월의 시 진달래꽃 그리고 우리의 대중가요까지 더듬으며 추억에 잠겨보니 진한 그리움이 저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60대 중반이 된 나이인데도 아지랑이 피는 계절이 다가와서 그런지 지나간 세월들이 속절없이 느껴지며 돌아갈 수 없는 날에 대한 회한의 늪으로 빨려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금년 봄부터는 진달래꽃을 희망의 등대지기로 삼아 과거의 슬펐던 가슴앓이는 이제 그만 멈추고 외딴 무인도에서 벗어나 피안의 저 언덕을 향한 인생의 항해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글·사진: 이화구(CPA 국제공인회계사·임실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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