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상황을 엄밀히 관찰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계간 ‘황해문화’의 진태원 편집주간이 125호 권두언 ‘다중재난 시대의 인공지능 혁명’에서 역설한 내용이다. 미증유의 내란 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과 접목하여 읽다 보니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비록 ‘다중재난 시대의 인공지능 혁명’을 인식하고 살아가기 위한 한 가지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강조한 그의 말이지만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위협하고 불확실성과 다양한 위험 상태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갈 혜안이 함축된 것으로도 해석된다.
우리에게 처한 현 상황은 그동안 스스럼없이 누려왔던 민주주의의 위기와도 연결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2·3 내란 사태’ 이후 우리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위험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초헌법적 명령에 투입’ 사실 알고 죄책감·충격에 빠진 군인들...’부정적 낙인’에 고통·괴로움 호소

임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내란에 투입돼 시민들과 맞서야 했던 군인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와 우울, 불안 등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간 이들은 자신이 계엄군으로, 그것도 초헌법적인 명령에 투입됐다는 사실을 알고 죄책감과 충격에 빠진 상태라고 한다. 이른바 ‘도덕적 손상’이란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직접 만난 전문가들은 “그날의 고통이 이들을 계속 짓누르고 있다”며 “상황을 모르고 투입된 군 장병들에겐 부정적 낙인을 거둬야 한다”고 진단할 정도다.
내란 사태를 목격하거나 직접 현장에서 계엄군과 마주한 시민들도 엄청난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호소가 줄지 않는다. 가뜩이나 민생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개월 연속 2%대 오름세를 지속하며 서민들의 불안과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와 국내 불확실성이 맞물리며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 우려까지 나온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유가·환율 상승은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소비 위축으로 중소상공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최악의 경기 침체 상황 속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가계소득은 줄어들고 또 다시 소비 여력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진 경제 위기에 내몰린 시민들은 내란 사태 이후 전대미문의 고통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내란 진압 없이 경제 위기 극복은 요원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다. ‘12·3 비상계엄’으로 실질 GDP가 6조 3,010억원 날아갔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불확실성 다중재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위기를 우리는 함께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최상목 권한대행, 경제 위기 날로 ‘심각’ 불구 '거부권' 남발·결정 '뭉개기'…불안 가중

무엇보다 경제 위기가 날로 심각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내란 특검을 거부하거나 지연시키는 행위는 경제를 더욱 나락으로 보내자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올 만도 하다. 더욱이 경제 전반을 지휘하고 책임져야 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재의요구권(거부권) 남발로 탄핵 정국을 더욱 어수선하게 하며 경제 불안 요인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달고 다닌다.
특히 뚜렷한 이유 없이 마은혁 헌재재판관 후보자 임명을 차일피일 미루는가 하면 중요 결정을 잇따라 뭉개는 행태에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국민들은 더욱 분통이 터진다는 반응이다. 국회 몫 헌법재판관을 선별적으로 임명해서 국헌을 문란케 한 것도 모자라 이를 바로잡도록 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사과 한마디 없이 1주일여째 뭉개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닌 헌법을 뭉개는 것이라 걱정이 크다. 더구나 이러한 대통령 권한대행의 뭉개기 행태가 도를 넘어서면서 헌법기관 침탈이나 탄핵 불복 등 헌정질서 교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크다. 그의 거부권 행사는 현재까지 일곱 차례로, 대통령 권한대행 중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명태균 특검법' 거부권 행사까지 할 경우 여덟 차례로 늘어나게 된다.
탄핵 정국을 뒤흔들게 할 만한 '명태균 특검법'은 지난달 27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국민의힘은 최 권한대행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한 상태다. 앞서 한덕수 전 권한대행도 6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니 최 권한대행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거부권을 행사한 것으로 기록됐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 피의자 구속 취소’ 신청 받아들인 법원, 치밀하게 계산 못한 검찰…납득 어려워

이런 마당에 법원이 7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취소 신청을 받아들여 혼란과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대통령 관저를 봉쇄하고 극렬히 저항하던 윤 대통령을 체포·구속하는 과정에서 국가 전체가 더 없는 혼란을 겪은 상황에서 구속을 취소해야 한다는 법원 결정이 안 그래도 탄핵 심판 내내 ‘체포 지시는 없었다’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던 윤 대통령의 온갖 거짓과 궤변에 울화가 치민 민심을 더이상 화나게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기간이 만료된 상태에서 공소가 제기된 것으로 보는 게 상당하다”며 검찰이 구속 기간 10일 이내에 기소해야 하는데 이를 9시간 45분 넘겼다는 이유로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매우 엄중한 상황에서 법원이 제시한 구속 취소 사유도 선뜻 납득하기 힘들지만 만약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검찰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또한 일수 단위의 구속기간 계산은 검찰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방식인데 법원이 그동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다가 하필 윤 대통령 사건에서 이를 구속 취소 사유로 삼은 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왕법꾸라지 망동’, ’법비 요설’ 난무…함께 연대해 힘과 지혜 모아야

이번 내란 사태에 이은 탄핵 정국에서 사법 절차와 형사소송 과정 등이 권력자들의 법기술로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특히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검찰총장 출신인 대통령을 비롯한 내란 참여 및 동조 세력들의 교묘한 법망 피하기와 헌법 흔들기를 바라보며 ‘법꾸라지 중에도 왕법꾸라지의 망동’, ‘법비(法匪·법을 악용하는 무리)의 요설’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만인 앞에 평등하다'던 법이 왕법꾸라지와 법비들에 의해 농락당하는 모습에 씁쓸함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고 미증유의 내란 상황에서 자포자기나 비관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끈기 있게 관찰하고 연대하여 대안을 모색하되 섣부른 대안에 쉽게 열광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행히 비상식과 비민주주의로 점철된 내란 행위에 대한 ‘위대한 거부’가 군과 공직사회 등의 조직 내에서 일고 있고 ‘집단지성’이 시민사회에서 용솟음치며 대중을 일깨우고 있다.
그럼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미증유의 내란이 지속되는 상황을 막지 못한다면 불확실성 다중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동시에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상황을 엄밀히 관찰하고 인식하며 함께 연대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