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75)

지난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트로트 4대 천왕' 송대관 가수는 정읍 태인의 꾀꼬리 명당에서 태어났다. 풍수물형 중에 매미나 꾀꼬리 명당, 선녀가 가야금을 타는 모양인 옥녀탄금혈에서 대명창 가수가 난다고 한다. 유성기 시대 판소리스타 이화중선 생가는 매미명당이고, 고창출신 김소희 국창은 '옥녀탄금혈'에서 득음했다고 한다.

가왕 조용필 씨 생가 터도 꾀꼬리 명당이라고 한다. 과연 개천에서 용이되어 가수왕으로 비상한 고 송대관 씨는 꾀꼬리 명당 바람으로 복을 받아 출세했을까? 고인의 고향 태인의 주산인 항가산이 큰 나무의 잎이고, 피향정 주변 너른들이 뿌리라면 송대관 생가터는 나무가지에 매달린 새집 모양의 꾀꼬리 명당터다(김두규,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쨍하고 해뜰 날'로 상징되는 가수 송대관,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한 서민 가수 송대관의 삶은 온몸으로 산업화시대를 개척해온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가수 송대관의 증조부는 모악산 금광도 경영했던 부자였다고 한다. 독립유공자인 조부 송영근이 태인 3.1만세 주동한 이후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일찍 여의자 집안이 쇠락하여, 어린시절부터 홀어머니와 고난의 인생길을 가야할 팔자였다.

다행히 친척의 권유로 꿈을 안고 전주에 유학와서도 낮에는 이발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주경야독으로 영생고를 다녔다. 해방 후에도 지속된 독립투사 후손들의 고난의 인생사를 겪은 송대관 집안 운명이었다. 그는 운명에 굴하지 않고, 꿈을 안고 뛰고 뛰어 역경을 헤치고 노력한 결과, 마침내 인생곡 '해뜰 날'로 가수왕에 오르는 성공신화는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자신이 직접 쓴 해뜰날 노랫말처럼, 슬픔도 외로움도 걷어차고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꿈을 이룬 송대관의 인생역정은, 가난한 고학생들이나, 모교 영생고 동문들, 고달픈 가수지망생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의 이정표였다.

소리 명당 '앵가리'가 안동으로

우리 겨레는 옛적부터 매미와 꾀꼬리를 동물들의 가수왕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꾀꼬리 명당, 매미명당에서 명창이 난다는 속설이 생겨난 것이리라. 예쁘고 노래 잘 하는 꾀꼬리는 옛 시가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는데, 한국사 최초의 한시로서 고구리 2대 유리왕이 지었다고 전하는 '황조가'도 꾀꼬리를 노래한 것이다. 고창지역에 전승되는 민요인 화투타령에도, "정월 송악에 백학이 울고, 2월 매화밭에 꾀꼬리 울고ᆢ" 라고 하여, 화투그림인 2월 매조도의 주인공 새를 꾀꼬리로 노래한다. 꾀꼬리 앵자를 쓴 꾀꼬리마을 앵곡(鶯谷), 꾀꼬리 둥지 앵소(鶯巢), 꾀꼬리 노래 앵가(鶯歌) 등이 땅이름에 쓰인 꾀꼬리 명당이다. 완주 이서의 콩쥐팥쥐이야기 마을도 앵곡이고, 영광 불갑사 앞마을, 정읍 고부 등에도 앵곡마을이 있다. 유명한 호남거유 노사 기정진의 할머니 묘소는 노랑 꾀꼬리가 나무를 쪼는 모양 '황앵탁목형'이다.

한반도 판소리 문화수도인 고창에는 소리 관련 명소가 많을 수 밖에 없다. 판소리의 아버지 동리 신재효 생가인 모양성앞 동리정사, 조선 최초 여류명창 진채선을 키운 심원면 사등마을, 국창 김소희 득음처인 아산면 반암 옥녀탄금혈, 김소희 생가터인 흥덕 사포 뒷개는 이미 대명창 배출로 검증된 소리명당이다. 특히 후포와 해창이 있었던 흥덕 뒷개마을은 이날치 제자 김토산, 김토산 제자 김성수, 동학농민군출신 이화서 명창, 퉁소명인 편재준 등 많은 소리꾼을 배출한 판소리 못자리 명당이다.

그밖에도 꾀꼬리 명당이라고 전승된 고창읍 앵가리, 소리꾼들의 산공부 터였고 국민가수 진성을 키워낸 문수계곡 은사마을 등이 있다. 높을고창의 지명에 남은 대표적 꾀꼬리 명당은 고창읍 도산리 안동마을이다. 안동은 본디 꾀꼬리 노래란 뜻의 앵가리였다. 필자 세대까지도 안동마을에서 시집온 부인들 댁호를 앵가리댁으로 불렀지, 안동댁으로 부르지 않았었다. 누군가 행정에서 제멋대로 안동으로 바꿨지만, 여전히 주민들 사이에는 친근한 앵가리로 계속 불러온 것이다. 앵가리 마을 뒷등은 꾀꼬리 둥지란 뜻인 앵소등이라 불러왔다.

문수산 바람타고 보릿고개 넘어 출세한 국민 가수 '진성'

황윤석이 지은 '도산팔경'에도 첫구가 '도산정에 노래하는 꾀꼬리'인 걸 보면, 지금까지도 천제를 지내온 도산리 천제단 고인돌 뒷마을은 꾀꼬리 명당이라고 전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앵가리라는 재미있고 독특한 역사적 고유지명이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시에 쓰기 쉬운 편안안 자 안동으로 바꿔치기 해버린 일은 못내 아쉽기만하다.

한국 농촌 경관농업의 효시인 고창 공음면 청보리밭 주차장 앞에 가수 진성 씨의 '보릿고개' 노래비가 있다. 청보리밭에 꼭 어울리는 보릿고개 이야기 노래비이기도 하고, 진성과 보릿고개는 보릿고을 고창 기운이 만든 까닭이다. 진성 씨가 유소년기를 보낸 실질적 고향은 고창 고수면 은사마을 꾀꼬리 명당이다. 비록 그의 출생지는 부안군이지만 부모가 일찍 가출하여, 그는 세살부터 10여년간 고수 은사마을 병든 할머니 품에서 외롭고 배고프고 가슴시린 유년기를 보냈다.

명예 고창 군민, 홍보대사 위촉, 청보리밭에 진성의 보릿고개 노래비를 세우는 일로 만날 때마다, 그는 필자에게 "부안의 어린시절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내 유년의 추억은 오롯이 고수 은사리에만 머물러 있다"고 했다. 고모님이 일가인 진의종 총리댁에도 가끔 출입했었다는 이야기며, 고창장날 고갯길 넘어 고모님 따라가서 눈깔사탕 하나 얻어 먹은 이야기, 옆집 진현 할머니가 주신 고구마, 강냉이 하나 받아들고 문수산에 뛰어올라 노래하고 눈물짓던 서러운 이야기를 생생하게 추억했다. 인생의 가장 여리고 시리던 그 시절에 같은 마을에서 함께 조손가정으로 의지하며 컸던 동네 후배 가수 진현 씨도 살뜰이 챙기면서 의형제의 연을 이어가는 따뜻한 마음도 엿볼 수 있었다.

마침 진성 씨의 인격이 형성되었을 고수 은사마을은 노랑 꾀꼬리 명당, '황앵탁목형'이다. 마을모정 뒤 은사천에 튀어나온 바위가 꾀꼬리 부리이고 앞산이 꾀꼬리가 쪼는 나무이다. 예전에는 여름철이면 고창소리꾼들이 문수계곡에서 소리공부를 하기도 했고, 현재 고창군 판소리보존회 김옥진 회장도 이 마을에 연습실을 두고 있다.

명당 복받는 비결은 '해뜰날' 가사 속에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오랜 무명 생활, 암 투병 등 역경을 모두 스스로 극복하고, 국민 가수로 성공한 진성씨도 자수성가 인생 칠전팔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가슴시린 한의 노래가 직접가사를 쓴 '보릿고개'와 직접 작곡한 최근의 히트작 '소금꽃' 속에 한의 정서로 절절히 녹아든 것이다. 그의 마음바탕을 단단하게 만든 자양분이 된 배고픈 어린시절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 한국적 정서와 한을 한껏 승화해낸 명가수 진성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가수 진성을 키운 건 팔 할이 보릿고을 문수산 꾀꼬리명당 바람이라 할 수 있다.

돈복과 부모복 하나 없는 외롭고 고단한 환경과 암투병 등 간난신고를 다 극복해내고, 기어이 트로트계의 별이 된 진성과 송대관의 자수성가 성공신화는 개천에서 용이나는 신나는 이야기다. 같은 꾀꼬리 명당 기운을 받은 송대관과 진성은 과연 명당바람만으로 출세했을까? 송대관도 그의 인생 압축판 같은 '해뜰날' 가사를 직접썼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사람이 가슴속에 꿈을 꾸고 노력하고 또 하면 해뜰 날이 온다는 신념과 의지가 그를 살린 비결이자 부적인 것이다. 진성의 '보릿고개'에 나오는 "아야 뛰지마라 배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길", "소금꽃"에 나오는 "고독의 몸부림 서러움에 꽃이 핀 아버지 등 뒤에 핀 하얀 소금꽃" 같은 눈대목은, 인생의 짙은 그늘을 스스로 체험하지 않고서는 실감할 수 없는 마음속에 빛나는 보석상자다. 사람이 역경을 기회로 만들고자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고 노력하면(自彊不息), 반드시 하늘이 도와서 안되는 일이 없다(自天佑之 吉无不利).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하늘의 법칙이고, 송대관의 해뜰날 가사이고, 명당발복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없는집 자식, 촌놈들이 도회지 부잣집 자식들보다 훨씬 많이 물려받은 무한한 생존 에너지 유산이다. 이미 전통의 꾀꼬리 명당 터전인 소리문화의 수도 고창과 전북에서, 케이팝 전성시대 지구촌 소리판을 주름잡을 대명창, 국민 가수 스타들이 줄이어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우리들의 허물없는 '이웃 성님' 고 송대관 가수의 명복을 삼가 빈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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