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71)

'세상살이 한바탕 깨우치려거든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릿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명나라의 유명한 서화가 동기창이 그림 그리는 화법의 안목을 논하면서 쓴 말이다.(讀萬卷書 行萬里路). 사르트르는 "인간은 걸을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는 통찰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인생살이는 곧 길 걷기이고,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노랫말도 친근하기만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걷기를 즐겼고, 길위에서 사람들과 교유하며 우주의 변화원리도 깨달았다.
국내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착안한 제주 올레길이 화제가 되면서, 해파랑길, 지리산 둘레길 등 방방곡곡에 걷기 코스가 생겨나고 걷기 열풍이 한바탕 불었다. 고창에는 전국의 걷기 마니아들 사이에 인문학걷기 명소로 은근히 소문난 '고창 여백의 길(별칭 성공 무대길)'이 있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들이 언젠가는 걷고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길이다. 걷기 학교를 운영하면서 <당신은 아직 걷지 않았다>라는 걷기교본 책을 쓴 걷기 전문가 정민호 작가와 걷기 애호가들이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보조금 한푼 받지않고 만들고 살려낸 길이다.

정 작가는 "걷기는 개인과 국가미래의 흥망성쇠를 좌우할만큼 중요하다. 걷는 자는 결코 병들지 않는다. 몸은 물론 정신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한다." 고 단언한다. 건강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걷기가 건강비결, 장수비결, 만병통치약 같은 가장 좋은 운동법이라고도 말한다. 한국의 걷기 바람을 불게한 도보답사의 선구자이자 우리땅걷기 이사장인 신정일 선생 덕분에 해파랑길, 변산 마실길, 소백산자락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이 시작되었다. 2009년도 필자가 전북도 문화관광국장 당시에는 한국의 종교상생 전통을 살려,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등 4대 종단과 함께 만든 종교 상생의 '아름다운 순례길'을 전주·완주·익산·김제지역 4대 종단의 성지를 포괄하여 만들고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걷기 고수들이 사랑하는 '여백의 길'


전북도의 '애향천리마실길' 시책의 일환으로 각 시군마다 마실길, 둘레길 등 걷기코스 길이 만들어지고 걷기 행사가 이어졌다. 고창에도 군에서 돈들여 만든 '애향천리마실길', '요강이 뒤집어지는 복분자 길' 등이 있으나, 사후관리 소홀로 안내판도 부서지고 인적이 끊겨 잡초만 무성한 곳이 많다. 다행히도 서해랑길 해당구간인 41, 42, 43코스가 고창 서해안과 선운사 지역을 통과하는데, 정부의 지속적 지원과 관심으로 사후관리와 정기적 답사행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반면에 보조금 1원도 받지 않고 걷기 애호가들이 푼둔 모아 재능 기부로 스스로 가꾸며 걷는 '고창 여백의 길'은 토요일 정례 걷기가 2025년 1월에 200회에 이르렀고, 전국 걷기마니아들의 선망의 길이 되었다. 순수한 민간 재능기부의 힘이자 지속의 힘 덕분이다. 고창군의 해안선권, 북부권, 동부권역에도 이런 길을 가꿔나간다면 고창은 인문학 걷기의 성지가 되리라. 정민호 작가는 대산면 광대리 출신으로 젊은 시절, 80일 동안 3,000km 걷기 여행을 체험하면서 깨우친 게 많아 마침내 걷기 연구가가 되었다. 오랫동안 ‘인문학적인 걷기 길’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2016년 9월 추석연휴 때 찾은 고향마을 뒤안길을 거닐다가, 고창의 고향산천이야말로 평생 자신이 찾던 바로 그 이상적 길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찾던 길의 요건은, 교통사고 위험이 없는 안전한 길, 여성 혼자 걸어도 위험하지 않은 길, 길을 잃어도 걱정없는 길, 서너 명이 애기하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길, 유명한 풍광이 없어서 걷기에만, 사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생각하는 길이었다. 제주 올레나 다른 경치좋은 길이 가끔씩 먹는 외식이라면, 고창 여백의 길은 끼니마다 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는 김치와 집밥같은 길이다.
‘여백의 길’은 길목마다 천제단 천문대 고인돌이 반겨주는 한반도 첫 수도 주무대이던 역사문화유산 길이다. 눈이 시원해지는 공제선, 파도파도 가도가도 황토밭이 있는 광활한 비산비야 들판인 성송면, 공음면, 무장면, 대산면을 감아 돈다. 네 개 면의 앞 글자를 따서 별칭 ‘성공무대 길’이라고도 부른다.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현대문명 사회에서 고립되고 박제된 나를 떠나서, 내 마음속의 참 자아를 찾는 성공한 인생길이라는 뜻이다.
농생명 생태 걷기의 표본 '고창 여백의 길'

아름아름 소문이 나자, 2019년 4월에는 TV 다큐멘터리 ‘걷기 고수들이 사랑한 길’에 소백산 자락길, 제주 올레길과 함께 전국 3대 걷기 명소로 ‘고창 여백의 길’이 방영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어서 2020년 7월 4일 ‘여백의 길 탐험대 발대식’을 가졌으며, 매주 토요일 자발적 정기적으로 한 코스씩 걷기를 한다. 1년에 한 두 차례는 2박 3일 일정으로 73km 전 코스 다걷기 행사도 벌인다. 특히 이 행사는 산티아고길 순례에 도전하는 이들의 연습코스로도 자주 활용된다. 고창의 지형지물도 산티아고와 유사하고 하루 20여km씩 걸으면서, 산티아고길을 세번이나 순례한 김영신 선생의 경험과 지도를 전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에는 7인의 여백의길 사진작가들이 고창 문화의전당에서 ‘생명의 땅’이라는 주제로 '여백의 길 사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여백의 길 길라잡이로 재능 기부를 하는 고교 지리교사 김덕일 사진작가는 2024년 6월 광주에서 '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환경사진전을 개최하여 생태환경보전운동가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여백의 길 밭 가운데에 묘지만 남아서 외롭게 지키는 안타까운 환경 파괴 현장, 사라진 숲대신에 남은 묘지로써 우리에게 사라진 숲을 생각하게 했다.

여백의 길은 이렇듯 하늘땅사람이 함께 하는 길이다. 걷기 중간에 쉬는 마당에는 시낭송이나 이업종 교류처럼 다양한 인생경험들을 서로 나누는 인문학 공부마당이 벌어진다. 참가자 모두가 사람책이 되는 열린 인문학당이다.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고 자연미를 살리기 위해 인공적 표지판을 일체 세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갈림길에는 리본달기, 길바닥 방향표지, 기존 전봇대에 점찍기 등으로 표지하여,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여백의 길은 현대문명에 지친 소외된 이들에게 고향의 ‘어머니의 품 같은 길’을 걷게 하고싶다. 힘들고 지친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지어주신 ‘따뜻한 밥 한 끼 같은 길’ 이 ‘여백의 길’을 만든 운영자들이 꿈꾸는 길의 이미지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특별히 삶이 힘들고 지친 이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평정과 살아낼 용기를 되찾기를 염원하는 어머니의 비나리가 깔려있는 길이 되고 싶다.
이 길은 똑같은 길을 매주 걸어도 다른 풍광을 만나게 된다. 고인돌시대 문명수도였던 고창은 미네랄과 유효미생물이 많은 황토와 해풍 덕분에 농생명산업의 수도다. 주요 농작물중 전국 10위 이내에 드는 한국 최고 품질의 고창 쌀, 수박, 멜론, 인삼. 땅콩, 고추, 고구마, 무우, 배추 경작지의 사계절 변화를 즐기며 걷는다. 무수한 고인돌과 당산과 모정, 여름철 달빛걷기에서 만나는 별자리와 은하수, 그리고 씨뿌리며 가꾸는 착한 농부들을 만나는 길이다.
꽃씨를 뿌리며 걷는 이가 역사의 주역이다

한국 지리학의 아버지 신경준 선생은 <도로고>의 서문에서 "길에는 주인이 없으니 걷는 이가 주인이다"고 했다. 여백의 길을 여는 데는 재능기부 운영자들이 꽃씨를 뿌리고 가꿔왔지만, 걷는 이가 주인이다. 이 길의 구호인 '평등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함께 걸으며 행복하자'고 다짐하며, 걷는 나그네는 누구나 진정한 주인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도와줄 때 진정 내가 행복하다고 한다.
확실히 꽃길만을 걷고 싶거든 내가 꽃씨를 뿌리며 걸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22년 4월 25일 여백의길 개통식 축사에서 필자는 여백의길을 만들고 걷는 이들은, 세상을 꽃밭으로 만들기 위해 꽃씨를 뿌리는 사람들이라고 격려했다. 고창 여백의 길의 끝이 창대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졸시로 주말걷기 200회를 삼가 심축한다.

<꽃길만 걷는 비결> -유기상-
꽃길만 걸으셔요
날마다 문자인사가 온다
보기만해도 달콤하다
꽃길만 걸으셔요
듣고 또 들어도 달콤한 꽃길 안부
보고 또 보아도 상쾌한 꽃길 마중
꽃이 피어야 꽃길을 걷지요?
길에 꽃은 누가 심지요
나만 왜 꽃길만 걸을 수가 있지?
꽃 한 포기 심지 않고
꽃길만 걷고 싶은 사람 심뽀
세상에나 사람살이 어디 꽃길만 있간디
하늘 땅 하는 일이 어디 내 욕심대로 되간디
한바탕 땡볕 뒤엔 폭풍우도 치기 마련
수줍은 제비꽃 숨어 피는 이웃에는
밟히며 피어나는 질경이도 피기 마련
오르막길 지나가야 내리막도 있기 마련 ᆢ
하늘땅에서 귓속말로 사알짝 알려주신 속삭임
네가 꽃씨를 뿌리며 걸어라
틀림없이 그 길은 꽃길이 되리니
네 새끼들도 꽃길을 걸을 수 있으리니 ᆢ
어디서 노상 듣던 울 엄니 말씀이네
우리 엄니 용구개댁이 입에 달고 사시던 말씀이네
지 손발로 살림 불려가야 사는 재미제 잉
꽃길만 걸으면 뭔 재미다냐 잉
가시밭길 깔딱고개 다 넘어봐야 인생 진재민거시여
꽃씨 한 톨 안뿌리고 꽃길만 걷자는 건 도둑놈 심뽄거시여!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