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67)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누구를 만나느냐이다. 내 인생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을 사주명리학에서는 귀인이라고 한다. 세상을 구할 잠재능력을 가진 천재라도 귀인을 만나지 못하면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조선후기 영정조시대 호남3천재라 불리던 호남의 3대실학자가 순창출신 여암 신경준, 고창출신 이재 황윤석, 장흥출신 존재 위백규다. 이들이 경륜천하할 기회를 얻었더라면, 호남과 조선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한국 지리학의 아버지 '신경준'

여암 신경준 초상화.
여암 신경준 초상화.

당대에는 차별의 땅 호남출신에다 출신배경도 약하여 벼슬로는 크게 쓰이지 못했으나, 천지인을 달통한 박학과 저술, 위대한 실학사상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기록될 대학자다. 호남은 사실상 실학의 못자리였지만, 근기학파니 영남학파에 가려져 호남파 실학이란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전북대 사학과 하우봉 교수가 호남실학자에 주목하면서 호남파 실학자가 조명되었고, 필자도 박사학위 논문제목부터 호남파 실학자라는 용어를 쓰면서 '호남 3천재'를 연구하였다.

그래도 3천재 중 가장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고 국가 편찬사업에 참여한 인물이 여암 신경준(1712~ 1781)이다. 궁벽한 호남변방 출신에다 정치적 배경도 유명한 스승도 없이 스스로 깨우친 천재 여암을 과거에 합격시켜준 시험관이 이계 홍양호다. 신경준의 답안지 대책을 보고 여암의 천재를 알아본 홍양호는 평생 여암의 관직 보직을 도와주며 교유하였고, 사후에도 여암유고 서문까지 써준 귀인이다. 여암이 가신 뒤에 구슬같은 그의 저술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도,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어서 자칫 역사에서 사라질뻔한 대학자 신경준을 사후 150여년 뒤에 다시 부활시킨 귀인은 위당 정인보다.

위당은 신경준을 국어학의 중흥시조라고 평했다. 홍양호와 정인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암은 역사책에 없었으리라. 어제 12일 순창군에서 뜻깊은 여암 신경준 학술대회가 열렸다. 대학자 신경준을 다시 조명하여 지역의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다. 필자도 '한국지리학의 아버지 여암 신경준'의 국토지리 풍수지리 인식과 문화유산 활용방안에 관한 주제발표를 했다.

학회전에 여암 묘소와 사당인 남산사에 들러 여암선생께 참배하면서, 백두대간 호남정맥 이름하나도 광복하지 못한 후학으로서 부끄러움을 참회하였다. 다행히도 찾기 힘들고 쓸쓸하던 여암 묘소를 최근 순창군이 크게 정비하면서 묘소입구의 고인돌 천문대가 눈에 확 들어와서 뛸듯이 기뻤다. 여암 묘소주변 정리 덕분에 수천년 숲속에 묻혀있던 보물 천문대 고인돌이 광복한 것이다.

한국 실학의 못자리 '호남'...'호남 3천재' 신경준·황윤석·위백규

4,000여년 전 눈밝은 순창 선인들이 섬진강가 꽃명당인 이곳, 동녘의 한일자 산능선 위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와 별을 보며 하늘을 경배하기 좋은 이곳에 고인돌 천제단을 세웠으리라. 고인돌의 자른 면 각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동지 일출방향으로 설계되었고, 긴 축은 북극성 방향 남북축으로 배치한 고인돌 천문대다. 이곳은 또한 조선후기 신경준의 시대에는 호남 거유를 모시던 화산서원 터였다. 사후에는 신경준도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화산서원과 천문대 고인돌 설명판 하나만 세위두면, 한국지리학의 아버지, <산경표>를 지은 신경준 묘소를 참배하는 이들에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순창의 산 역사를 조망하는 명소가 되지않겠는가? 신경준 부활의 길조다.

이번 학술대회가 아직도 크게 저평가된 호남3천재, 여암 신경준과 한국인의 혼백인 산줄기 물줄기를 되찾는 <산경표> 광복의 또 하나의 귀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조선후기 팍팍한 민생과 부조리한 현실개혁 방안으로 등장한 실학의 못자리가 전북이고 호남이다. 실학의 씨를 뿌린 비조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쓰며 공부하고 개혁방안을 찾은 현장이 부안이다.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는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 등 방대한 저술을 한 곳도 호남이다.

안정복, 홍대용, 정약전, 서유구 같은 실학자가 그들의 사상을 농축시킨 자양분을 얻은 곳도 호남이다. 호남출신 실학자로는 앞에서 든 호남 3대실학자 이외에도, 화순출신 나경적, 하백원, 안처인 등이 있다. 19세기에도 다산학단 출신들과 김제의 이정직, 이기, 구례의 황현 같은 실학자가 실학을 개화사상으로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우봉, 여암 신경준과 호남실학)

실학이 싹트고 꽃피고 열매맺은 본고장이 호남이라는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에서는 기호학파니 근기학파 등은 자주 언급하면서도 정작 호남파라는 용어도 없었을만큼 홀대받았다.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호남출신 대학자들이 학문마당에서까지 저평가된 것이 안타깝기만 한 현실이다. 그런 인식에서 필자도 호남파 실학자에 주목하였는데, 최근 고창군과 전북대 이재연구소, 후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황윤석이 재조명되고 있어 다행이다. 여기에다 국어학의 증흥조, 지리학의 아버지 신경준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실학의 온상인 전북의 빛을 되찾을 시절인연이 오는듯하다.

한국인의 산하족보 '산경표'

'조선 지리학의 아버지 여암 신경준'은 3교 9류에 능통한 천재로 한시창작법 책인 <시칙(詩則)>을 풍수지리 원리로 비유해서 저술할만큼 철학적 지리관을 정립하고, 지리, 도로, 지도관련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국토와 해양을 포함하는 도로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실학자로 평가받는 신경준이 해양을 국토로 인식한 것은 대단한 통찰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바다를 잘 경영하던 해상 왕국일때 크게 번성했던 해양국가다. <도로고>의 도로범위에 육상도로 뿐만아니라 <해로>와 <사연로>, 바닷길과 수로까지 포함했던 여암의 인식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더라도 탁월한 견해다.

신경준은 <산수고>와 <산경표>에서 우리 겨레의 우주관을 담아, 우리 국토를 살아있는 하나의 우주 유기체로 인식한다. 산과 물줄기를 음양 분합체계로 보고, 1년을 상징하는 12산, 12수로 산줄기 물줄기 이름과 계통도를 체계화한다. 이것은 천지인 합일, 음양조화의 우리전통사상이 산줄기, 물줄기의 족보와 이름에 압축된 것이며, 한·중·일 3국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지리학 체계다. 우리 국토의 골간인 산하의 인식과 산줄기 이름은 오래전부터 불려온 것을 신경준이 족보식으로 정리한 것이 <산경표>체계다.

일제강점기에 '고또분지로'라는 일본 지질학자가 급조한 지질산맥도가 노령산맥, 태백산맥 타령이다. 아직도 노령산맥, 태백산맥 하나도 깔끔하게 지우지 못하면서 친일청산을 말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지도층과 언론이 앞장서서 교과서도 확 바꾸고 족보있는 산하이름을 어서 광복시킬 일이다. 지난 주에 프랑스에서 귀인이 고창 고인돌을 찾았다. 조정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현재 박경리의 <토지>를 번역중인 재불 한국인

변데레사 선생이다. 프랑스에서 한국 고창까지 노구를 이끌고, 소녀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고창 고인돌을 직접 보러오셨다. 고창 도산리와 고수 부곡리 천제단을 무릎꿇고 엎드려 관측하시고,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을 날이 저물도록 만져보신다. 고인돌은 묘지가 아닌 천제단, 천문대, 첨성대 신성물이라는 저희들 설명을 듣고나서 전적으로 공감하신다.

백두대간과 고인돌 '광복' 시급 

유럽에서 자신이 돌아본 영국의 스톤헨지나 프랑스의 까르낙 유적같은 거석유물도 묘지가 아닌 천문과 풍경을 고려한 신성물로 인식하고 있다. 학명인 돌멘이란 이름도 돌로 만든 천제단이란 뜻이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한국만 묘지라고, 지석묘라고 왜곡한 용어를 아직도 쓴다. 필자가 조사결과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고인돌을 지석묘라고 묘지라고 본 문헌사례가 한 건도 없다. 고리시대 이규보는 남행일기에서 지석을 성인이 만든 특이한 유적으로 보았고, 조선시대 내내 천제단 개념인 석상, 상석, 지석으로 보았지 묘지란 견해는 전혀 없었다.

춘추분, 하지 동짓날 고창 천제단 굄돌사이로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 바로 확인되는 과학적 사실이다. 고창을 포함하여 전국에 지석리, 지석마을이란 지명이 많은데, 공동묘지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과연 제 마을이름을 묘지마을로 썼겠는가? 일제강점기 일본민속학자 도리이류죠가 어느날 누명씌운 지석묘를 아직도 주장하는 고고학계 현실이 서글프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불어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물어봤다. 역시나 고유명사니까 그대로 태백으로 옮겼다고ᆢ우리가 신경준과 <산경표>를 조금만 먼저 복권시켰더라면, 저 명작은 마땅히 백두대간이었을텐데 하면서 아쉽기만 하다. 다시금 고인돌과 <산경표>의 시급한 광복을 염원한다.

역사도 아는만큼 보인다 했던가?

여암을 모시는 순창읍 남산대 남산사 비석주위에도 둥그런 돌이 세 개 있고 건물 뒷편에 하나, 남산사 앞 민가 마당에도 잘 모신 고인돌이 놓여있다. 필자가 10여년전 답사시 신형호 종친회장께 들은 이야기로는, 남산사 터가 봉황새가 알을 품는 형국인 봉황포란형이라 이 둥그런 바윗돌이 봉황알이라고 하셨다. 얼마나 찰지고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인가? 사실 이 바윗돌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있었던 고인돌 천문대다.

남산사 창건비 남쪽의 두 기는 90도 각도로 춘추분 일출방향으로 귀래정 방향과 일치한다. 비석 북측 둥그런 고인돌은 남쪽 고인돌에서 남북방향으로 북극성 방향이다. 건물뒤 묘지아래 돌과 연결하는 축은 하지 일출각도다. 이렇게 보면 수천년 전에 남산대에 세워놓은 북두칠성 모양의 천문대 고인돌이다. 선사시대 성스런 장소인 이곳 순창제일명당 남산대에 순창을 빛낸 인물 신경준을 모신 것은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신경준과 백두대간이 고인돌과 함께 광복된다면, 순창과 전북, 한국의 역사는 얼마나 풍부하고 아름다워질 것인가? 상상만해도 가슴 벅차는 아침이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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