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65)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구세군의 빨간 자선냄비가 등장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모금운동이 활발하다. 필자는 인류의 공통목표는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일이라고 본다. 내 행복의 비결은 남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나눔과 봉사와 기부를 생활화 하는 일이 복짓는 일이고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아가 우리사회를 품격있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비법이다.
우리 선인들은 대대로 나누고 베푸는 집안을 명문가로 쳤지, 고관대작과 부자집안을 명문가로 부르지 않았다.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고 선행을 쌓은 집안은 복을 받는다는 말을 즐겨쓴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다행히도 서로 돕고 나누는 노나메기 문화가 이어온 의향고창에는 역사 속의 기부천사도 많았다. 오늘날 문화나눔의 시초인 동리운동으로 기부를 실천한 판소리의 아버지 동리 신재효, 기생신분으로 모은 전재산을 이웃을 위한 돌다리 건설과 교량보수비로 남기고 죽은후에 강선교란 다리이름으로 전해오는 박강선, 평양의 봉이 김선달이 나를 위해 속여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을 때, 고창의 착한 강선달은 사비로 만든 저수지 물로 이웃사람들 농사를 도왔다는 미담이 전해오는 인심좋은 고장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복지국가로 진입했지만, 아무리 나라가 부자고 복지담당 공무원을 늘린다 해도 공공복지로는 소외된 이웃을 두루 다 돌볼 수는 없다. 그래서 지역사회주민 공동체들이 연대하는 지역사회복지 협의체가 중요한 구실을 해야만 한다. 고창군민들의 행복증진과 공동체의 품격향상의 푯대로서 나눔과봉사와 기부의 한반도 수도 고창만들기를 추진했다. 기부천사 명예의 전당을 군청현관에 설치하여, 기부문화 확산을 도모했다. 이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는 조용한 기부왕 김장하 선생은 날마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가 아껴서 남을 돕는 즐거움,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해야할 떳떳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 삶의 보람을 매일 느끼기 때문이리라.
문화동리운동의 선구자 '동리 신재효'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는 우리 국문학사,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판소리를 통해 민중들을 계몽하여 결과적으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의 의식화 교육을 한 혁명가 역할도 했다.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던 시대 강철천정을 깨고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을 키워낸 여성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행보는 신재효 집안의 나눔과 기부의 실천이다.
동리 신재효가 통정대부라는 고위 직첩을 받은 것은 평산신씨 집안의 자선사업 공로 덕분이었다. 신재효 집안은 관약방으로 번 돈을 집안 대대로 자선기부에 내놓은 적덕 집안이었다. 신재효의 백부 신광협은 곡식 3백석을 희사하여 무장현 빈민구제에 힘썼고, 부친 신광흡은 고창천 대홍수에 대비한 비보풍수로 세운 오거리당산 시설비, 모양성 작청건축비 기부, 인근 주민들의 구휼을 위해 때때로 수천냥을 자선사업에 기부하였다. 그 당시 소리꾼들 중 직업상 무당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동리는 월산마을 등 여러 곳의 집을 사주어 전용연습실로 쓰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오늘날 메세나운동이라는 문화예술 지원사업과 종합 예술기획 연구기관격인 동리정사를 자비로 무료로 운영하였다.
이런 연유에서 필자는 외래어 메세나운동 대신에 동리운동으로 부르자고 오래전부터 제안하고 있다. 대지 4천여평에 50여 가구가 함께 모여 숙식을 하며 살았고, 14칸 줄행랑채에 소리꾼과 식객들이 어울려 살던 동리정사는 일종의 문화생활 공동체였다. 소리꾼에게는 기숙형 무료 판소리학원이고, 연희예술 꿈나무를 키우는 조선아이돌 연예기획사이기도 했다. 주민들에게는 석가산, 연못과 정자 등 공연장은 진귀한 볼거리였고, 상설 무료공연으로 문화향유기관의 구실을 하면서 공짜로 밥도 주는 무료급식소 역할까지 했다. 모든 비용은 신재효가 부담했으니 당대 최고의 빈민구제 문화복지시설이 높을고창 동리정사인 셈이다.
봉이 김선달은 '사기꾼', 고창 강선달은 '기부천사'


선달이란 호칭은 무과시험에 합격하고도 아직 임용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다. 진사나 생원보다 쓰이는 빈도가 적으나, 흔히 선달하면 대동강 물까지 사기쳐서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이 떠오른다. 김선달의 사기꾼 이미지 탓에 선달이란 호칭이 나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나, 고창의 강선달은 기부천사다. 오늘날 한국6차산업의 모델사례인 상하농원 축사동 뒤에 호젓하고 예쁜 호수가 있다. 앞으로 이 호숫가에는 매일유업 상하농원 소장품을 전시하는 미술관도 들어설 예정이다. 이 호수의 이름이 바로 강선달 저수지다. 강선달은 이 지역인 상하면 섬포마을에 살았다.
이 지역은 바닷가이면서 큰 물줄기도 없는데다가, 해수가 올라오므로 지하수도 활용할 수 없어서 농업용수가 늘 부족한 한해극심 지역이었다. 1968년 한해 때도 피해가 극심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 방문을 하기도 했다. 2019년에 가뭄을 재해로 인정한 70억원의 국비확보로 물그릇 확대와 송수관로 매설 등 항구적 대책을 마련했다. 민선 7기에 와서야 겨우 해결한 이 어려운 물걱정을 조선시대에 한 개인이 해결하고자 사재를 들여 저수지를 만들었다. 항상 농업용수 부족으로 고생하는 이웃을 돕자는 생각으로 이 무모한 거사를 벌인 의인이 '섬포사람 강선달' 이란 이름으로 전승된다.
농민들은 강선달의 공덕에 감사하는 뜻에서 '강선달 저수지'라 부르기 시작했고, 오늘날 아름다운 상하농원의 호수경관 배경이 되었다. 상하면 구시포항 입구에는 강선달 힐링센터라는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팬션이 있다. 착한 강선달이 도와주는 덕분인지 이용자들 평판이 좋은 성공적인 마을가꾸기 거점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생 박강선의 월천공덕, 강선교


험한 세상 다리되어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예전에는 산넘고 물건너는 일이 험하고 어려웠다. 그러기에 개천에 다리를 놓거나 배로 사람들의 통행을 돕는 선행을 물을 건네주는 공덕, 즉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군수나 국회의원들이 다리 놓아주는 공약을 주로 했던 시절도 있었다. 현재 부안면 소재지와 흥덕면 석교마을 사이의 갈곡천을 연결하는 다리 이름이 강선교다. 조선시대 성종때 강선이란 기생의 아름다운 선행, 월천공덕을 기리려는 다리이름이다.
부안면 등선촌에서 양반의 딸로 태어난 박강선은 집안이 몰락하자, 지금의 강선교주변 흥덕면 석교리 길가에서 생계방편으로 주막을 차리고 근검절약하여 돈을 모았다. 주민들 숙원사업인 제방을 쌓고 다리 놓는 큰 토목공사에 나라도 관청도 큰 부자들도 나서지 않을 때, 나이어린 여성인 강선은 사재를 아낌없이 털어서 갈곡천에 안전한 돌다리를 놓는 월천공덕을 쌓은 덕분에, 그녀의 미담이 현재까지도 전해온다. 강선은 죽으면서도 유산 3백냥을 교량보수비로 주민들에게 남겨주고 갔다고 한다. 오늘날 부안면 알뫼장과 흥덕면 석교장을 연결하는 갈곡천의 섶다리가 큰 물만 나면 떠내려 가고 말아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굴렀는데, 기생 강선이 튼튼한 돌다리를 놓아 숙원을 해결해 준 것이다.


강선교 동쪽 석교(石橋)라는 마을이름도 강선교라는 돌다리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고, 현재도 돌다리의 기초흔적이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기생 강선의 공덕을 기록한 강선교 연혁비가 있었는데, 1950년대에 교통사고로 파손되었다 한다. 현재의 강선교 다리는 갈곡천 정비와 지방도를 확포장하면서 새로 놓았으나, 그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다리이름을 여전히 강선교로 쓰고 있어서 퍽 다행이다. 이병열 고창문화연구회장의 조사결과 강선의 묘로 구전해온 무연고 묘가 흥덕 내사마을 밭가운데 있었으나, 현재는 추모의 집으로 이안되었다 한다.
적선지가의 전통을 이어온 높을고창이 나눔과 봉사와 기부의 한반도수도가 될 때만 아이와 어른들 우리 모두 행복하다. 아이들 공부하라고 권장하는 말에 흔히 공부해라! "배워서 남주냐?"고 한다. 자녀의 행복과 함께 사는 고창을 위해서는 "배워서 남주자" "벌어서 남주자"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