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57)

다시 한글날 578돌을 맞이하며 선진국 한국의 말글살이의 미래를 또다시 걱정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익히기 쉬운 한글을 널리 사용토록 공식 발표한 훈민정음 반포일로 정한 한글날은 우리 말과 글에 감사하는 날이어야 한다. 한국문화의 대표적 상징이고, 요즘 뜨는 한류의 핵심요소인 한글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문화 강국 세종시대 이후 최강 문화융성기를 맞은 오늘날, 우리 한글의 가치와 효용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 나아가 지구촌의 말글과 상징으로 문화수출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런데도 거리의 간판들은 영어일색이고, 국적없는 한글간판, 알 수 없는 줄임말 비속어가 판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말글을 지키는데 솔선해야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공공기관과 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어관이 갈수록 천박하다는 문제다. 정부의 새로운 사업공모 제목을 보면 마치 외래어를 써야만 좋은 사업인줄 착각하고 있고, 공문서나 간판에도 국적없는 외래어가 어지럽게 춤추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어떻케 지켜온 우리 한글인가? 말과 글은 겨레의 혼이다. 비록 나라를 잃더라도 겨레의 말과 글, 역사를 보전하면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기에 일제강점기에 조선어 사용금지, 일어를 공식언어로, 총독부가 날조한 부끄러운 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왜곡하여 세뇌시켜, 한국인의 얼과 혼을 빼는 식민교육을 한 것이다. 보통학교 1주일 수업시간 32시간중 4분지 1인 무려 8시간을 일본어를 강요한 것도 그런 음모의 하나다. 한글날 노랫말을 지은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한글책 제목이 <한글의 투쟁>인 것도 한글의 고난의 역사를 함축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글을 연구하거나, 학교나 관공서에서 우리 말을 쓰는 것도 불법이었으니, 조선어 교육은 바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 민족교육의 거점 민족사학으로 '남고창 북오산'을 꼽는다. 이남 제일 민족교육사학인 고창고보는 평안도, 함경도에서도 유학생이 왔으며, 광주학생운동 등 항일운동의 고비때마다 앞장섰고,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전주의 신흥학교 전교생을 전입받는 등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한 전국의 학생들을 다 품어준 학교로도 유명하다.
'고창고보' 교사 정인승의 한글교육 독립운동

특히 전북과 고창고보는 한글수호, 한글교육 독립운동의 산실이었고, 해방후 정인승 선생이 주도하던 한글학회 사무실을 지키며 도운 이들이 한갑수(10회), 신한철(5회), 권승욱(12회)을 비롯하여 대부분 정인승의 고창고보 시절 제자들이었다. 권승욱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스승 정인승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제자다. 건재 정인승(健齋 鄭寅承 1897~1986)은 전북 장수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 영문과를 나와 고창고보 영어교사로 1925년부터 10년간 봉직하면서, 한글수호 독립운동을 했다. 우리말도 못쓰게 하는 일제의 황국화정책에 위기감을 느껴, 조선어학회 상임이사, 조선어 큰사전 편찬작업, 한글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통일안 기초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조선어연구회에서 우리말사전을 편찬하다가,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항일 독립운동 유공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 받았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부터 정인승, 최현배, 이윤재 등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자 33인을 검거해 내란죄로 기소한 공안조작사건이었다. 순수한 우리 말글운동을 내란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해, 3·1운동을 연상토록 피의자를 33인으로 꿰어맞추는 교활함을 보였다. 징역2년을 선고받은 정인승의 판결문을 보면, " ᆢ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ᆢ "라고 하여, 우리 말글을 없애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한 일제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그는 1933년 10월에 확정발표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시안을 그 전해에 서울에서 입수하여 사비로 인쇄한 후 전교생들에게 배포하고 학습시켰다. 특히 언젠가는 일제가 이 교재를 압수하려 할테니 소중하게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해방후 한글맞춤법을 아는 국어교사를 여기저기서 구할 때도 정인승의 고창고보 제자들이 인기가 있었다 한다. 그는 해방 후 중고교 <우리말 말본>, <한글큰사전>등을 편찬하였다. 고향인 장수군 생가터에 정인승 기념관, 유허비가 세워지고,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건재길이 생겼다.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정인승이 고창고보에서 한글사랑 운동을 한 덕분에, 한글학계의 거목 바른말 고운말의 한갑수가 한글학자 한갑수란 이름으로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전북 고창까지 유학온 한글학자 한갑수

우리말 바로쓰기 국민운동을 위해 해방직후부터 한국방송 라디오 '바른말 고운말' 프로그램을 1982년까지 무려 37년간 진행한 눈메 한갑수 선생의 목소리는 필자보다 이전 세대들은 아직도 귀에 선하다. 경기도 가평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13세 소년은 민족교육 학교를 찾아 머나먼 전북 고창고보에 유학을 온 덕분에, 참 스승 정인승을 만나 국학을 오롯이 전승받을 수 있었다. 눈메 한갑수(韓甲洙1913~2004)는 고창고보와 정인승 선생 인연으로 한글학자 한갑수라는 귀한 이름을 얻었다. 그는 1933년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상경한 후 정인승 선생이 주도하던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학회일을 도왔다. 이 당시 한글학회 정인승을 보좌한 대부분의 핵심인력은 한갑수와 앞에서 거명한 고창고보 제자들이었다.
그후 한갑수는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 법과, 중앙음악학교 성악과를 나왔다. 미국 공군 참모학교를 졸업한 후 공군장교, 음대교수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고, 영어와 일어에도 능통하였지만 바른말 고운말과 한글학자 한갑수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한글학회 이사장, 한글재단 초대이사장, 한글학회 이사, <국어대사전>, <바른말 고운말사전>을 펴내며 한글발전에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그의 고향 경기도 가평군에서는 2023년에 한갑수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고, 2024년 6월에 그의 호를 딴 '눈메 한글문화원'을 개관하여 한갑수와 그의 한글사랑 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갑수는 모교인 고창고보 총동창회장으로 상당기간 봉사하기도 하며, 전북과 고창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북출신의 조선어학회 독립운동 유공자로는 국문학의 거두인 익산 출신 가람 이병기와 학회에 재정지원을 한 김제 출신 전북 2대 도지사 장현식도 있다. 이병기와 장현식도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한류 바람타고 한글 세계화의 발신기지로

전북이 낳은 한글사랑 독립운동가 정인승·이병기·장현식·권승욱, 전북이 기른 한글학자 한갑수는 한류와 한스타일산업의 본류를 자처하는 전북이 디지털시대 한류의 세계화·산업화 과정에서 한글 문화 소재 활용에 소중한 자산이다. 한글을 지켜낸 그들의 공적을 기리면서, 적극 활용해야 할 전북의 소중한 문화콘텐츠가 아닐 수 없다. 한스타일산업 중심도시를 지향하는 전주시와 전북도에서도 적극 앞장설 명분과 당위성이 차고 넘친다.
정인승은 말본 책 서문에서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이므로 우리 말이 곧 우리 겨레다"고 통찰했다. 그러기에 한글사랑이 나라사랑의 출발점이다. 우리말글 사랑은 지도층부터, 중앙정부, 지방정부와 공공기관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한글 사랑 항일독립운동의 산실인 전북과 고창군, 장수군, 익산시, 김제시는, 국어사랑운동 모범도시가 되면 좋겠다. 그런 뜻에서 한글수호 독립운동 도시 고창군은 '고창군 우리말 바로쓰기 조례'를 이미 제정 시행한 바 있다.
세계 6대 강국, 선진국이 된 국력을 업고, 한류와 케이팝이 세계주류 문화로 편입된 지구촌에는 한글 디자인 의상, 한글 상호가 새겨진 중고차가 인기몰이를 한다. 동서를 가리지 않고 한글 공부 열풍이 불고 있다. 정작 한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한국인 만이, 선열들이 목숨걸고 지킨 한글의 소중함을 모른다. 각계의 지도층부터 우리말 바로쓰기와 한글사랑을 다짐하는 한글날이기를 기대한다.
서울의 용산, 치욕의 외국군대 주둔지, 일본군 사령부, 주한미군 사령부 터를 이제사 되찾아서, 빛나는 우리 역사문화의 중심기관으로 우뚝 세워진 국립중앙박물관이 자랑스럽다. 바로 옆에 국립한글박물관이 2014년에 문을 열고 한글의 역사를 알린다. 중앙박물관에 가시거든 꼭 한글박물관도 돌아보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문화지도자 세종대왕의 마음도 배우시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적 문자 한글, 이 한글을 만들고 보급하고 지켜내려고 목숨바친 선열들께 경배드리는 한글날이면 참 좋겠다.
/사진·글=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 군수)

정인승 선생님과 한갑수 선생님은 師弟之間으로 우리고장의 자랑 고창고보와 깊은 인연이 있어 이 두분께
1964년 원고를 청탁(가칭 - 高敞誌 -발간용)드려 글을 받았어요.
1) 정인승선생 ( 고창의 인상 )
2) 한갑수선생 ( 고창인의 체질과 체취 )
위 원고는 고향에 설립된 기념관에 수장토록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