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조식은 경상도 단성 현감에 임명되기가 무섭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 글은 같은 날짜 실록에도 실려 있다. 조식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벼슬을 주어도 하기가 어렵다고 말한 다음, 당시의 문란한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천천히 함께 읽어보기로 한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습니다.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1백 년 된 거목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고, 게다가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 된 지 이미 오래인 셈입니다.

조정에 있는 이들 가운데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하고 어진 신하가 없지 않으나, 그 형세가 이미 극에 달하여 그들의 손이 미칠 수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찌할 수 없는 곳뿐이라는 점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서 낄낄거리며 주색을 탐하고, 대신들은 윗자리에서 우물거리며 재물만 불립니다.”

"위로는 위태로움을 전혀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 어렵겠습니다" 

매우 과격한 발언이었다. 과연 사실에 근거한 지적일까 의문이 들 정도인데, 실록의 편찬자도 인정하는 그 시대의 고질적 문제였다. “공도(公道)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사문(私門)이 크게 열리었다.” 그때는 벼슬아치들이 나라 일을 걱정하기는커녕 제 호주머니만 챙기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식은 당시의 비참한 사회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중앙 관리들 중에는 자신을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마치 용(龍)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합니다. ... 지방관리는 백성의 재물을 마구 빼앗아,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고뇌하고 길게 탄식하여, 낮에도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정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 명종의 모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선왕(先王)의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연재해와 억만 갈래로 갈라진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말랐고 곡식이 비가 되어 내렸으니 그 조짐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음악 소리도 구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 변고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조식이 말한 변고의 조짐이란 무엇일까. 낙동강 상류의 물길이 끊긴 것을 말하였다. 명종 9년(1554) 겨울에 그러한 변고가 일어났다. 조식은 이러한 자연재해가 타락한 사회풍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명종이 크게 마음을 바꾸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를 촉구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극언하였다.

“초개 같은 한 미신(微臣, 조식이 자신을 낮추어 말함)의 재질로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전혀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어렵겠습니다. 변변하지도 못한 명성을 팔아서 전하의 관작을 사고, 국록을 먹으면서도 맡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누구보다 강직하고 나라를 깊이 사랑하는 큰 선비...왕에게 따지듯 질문한 이유는? 

조식의 산천재(山天齋) 전경.(자료사진)
조식의 산천재(山天齋) 전경.(자료사진)

요컨대 나랏일이 완전히 그릇되어 있으므로, 벼슬을 해보았자 조식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여러 말 끝에 조식은 그 어디서도 전례를 찾기 어려운 강한 어조로 명종에게 따지듯 묻는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에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

조식은 한 시대를 대표할만한 학식을 가지고도 시골에 숨어 살았다. 숨은 선비(逸士)라고 부를만 하였다. 그는 관직을 물리쳤음에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간절하였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용맹스런 의병장이 다수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승 조식이 누구보다 강직하고 나라를 깊이 사랑하는 큰 선비였기 때문이다. 훗날 명종은 조식에게 직접 물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서 세 번이나 초가집으로 찾아간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말이다. 조식의 대답은 이러했단다.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만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소열(유비)을 수십 년 동안 섬겼으나 끝내 한나라 왕실을 부흥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선비가 무엇인지, 선비가 왜 필요한지를 곰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세상 

이 말을 마치고 나서 조식은 서둘러 산으로 돌아갔다. 문장가요, 학자인 조식이 보기에 명종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던가 보다. 목숨을 다하여 보필하고자 하여도 이쪽의 성의를 제대로 알지 못할 왕이라면 하필 그 옆에 남아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조식은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과연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을까 의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조식이 옳았다. 내 마음을 이해 못하는 사람과 큰일을 함께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돈에 몰리고 자리가 탐나서 차마 못 할 일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깊이 헤아려볼 일이다. 특히 품위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최고 권력층과 아부만 일삼는 탐욕스러운 그 측근들이 횡행하는 이 세상에 그저 한숨만 내쉴 일이 아니라, 왜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는지를 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선비가 무엇인지, 선비가 왜 필요한지를 곰곰 다시 생각하는 초가을 저녁이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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