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론

“2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위기가 아닌 것이 없고, 다음 정부가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바로 잡고 고치는 데에 몇 년이 허비될 것 같다…오랜 시간 민주화운동을 해온 저희들에게는 새삼스럽지 않은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의 민주주의 수준은 40여년 전 박정희 정권, 30여년 전 전두환 정권 때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 일어나 나라를 지켜야 한다.”

단호함을 넘어 결기가 느껴진다. 민주화운동 원로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며 퇴진을 요구하고 나선 시국선언문 단어 하나하나에서 좀처럼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노동·시민사회·종교계의 원로 인사 100명이 모인 전국비상시국회의가 20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1,500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내용이다. 시국선언문에는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고하는 내용들로 가득 담겼다.

윤석열 정권이 임기 반환점을 돌고 2년 반이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원로 인사들이 들고 일어서 "우리 모두 일어나 나라를 지키자"며 “위기가 아닌 것이 없다”고 절규했다. “이 정권을 퇴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원로들은 또 “온갖 망동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국정 난맥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2년 반이나 남은 임기는 죽음처럼 너무 길기만 하다”고도 외쳤다.

이토록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시국선언은 근래에 보기 드물다. 이날 시국선언문에는 제안자 100인과 1,500여명의 서명인들이 이름을 올렸다. 시민사회와 학계를 비롯한 종교·언론·노동·예술 등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낯익은 이름들로 가득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지금 국가의 존망 걸려있는 위중한 시기…위기 아닌 것이 없어”

MBC 9월 20일 뉴스 화면(영상 갈무리)
MBC 9월 20일 뉴스 화면(영상 갈무리)

시국선언문의 주된 키워드는 ‘불통’, ‘무능’, ‘아집’, ‘탄압’, ‘파탄’, ‘퇴진’ 등으로 가득했다. 주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분노와 성토가 주를 이뤘다. 이들을 이토록 분노케 한 원인으로는 '의료대란의 출구를 막아서고 있는 대통령의 옹고집', '자신과 부인에게는 관대하면서 야권 지도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가중', '공영방송 장악과 대결 국면 조장', '자랑스런 독립운동의 역사를 친일·매국 역사로 변조', '정권의 무능을 전쟁 위협으로 호도' 등 다양하게 제기됐다. 

이 외에도 이날 모인 원로들은 "지금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위중한 시기"라면서 "▲현 정권이야말로 국가 기강을 허무는 '반국가세력'이고 ▲국민이 생명을 잃고 민생이 피폐해져도 외면하고 있으며 ▲친일·매국 역사 쿠데타로 나라를 망치고 있고 ▲정권 연장을 위해 언론과 방송을 무법적으로 장악해 왔으며 ▲생태-기후 위기에 대한 몰인식은 무지를 넘어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점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게다가 이날 전국비상시국회의는 시국선언 기자회견 불과 하루 전에 대관을 취소시킨 한국언론진흥재단을 규탄하는 성명까지 냈다. 시국선언은 당초 서울 중구 태평로1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전국비상시국회의는 이미 1주일 전에 예약을 완료하고 입금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스센터를 운영‧관리하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측은 이번 기자회견이 '정치 행사'라는 이유로 하루 전에야 대관이 불가하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보여지는 비판적 여론에 대해 정권 차원에서 강행하고 있는 '입틀막'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받았다.

이날 참석자들은 "결국 이것은 윤석열 정권하에서 시민과 사회단체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가뜩이나 이례적 9월 폭염 경보 속에 닷새 간의 긴 추석 연휴동안 민심이 싸늘하고 흉흉하기만 했다. 긴 무더위와 고물가, 의료대란 속에 맞이한 올 추석 밥상머리 화두는 단연 민생이 주류였다. 그런데 민심은 서늘하기만 했다. 특히 아직 임기가 2년 반이나 남은 윤석열 정권에 대한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노동 등 모든 분야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은 전례 없이 팽배하다.

48.56% 당선 윤 대통령, 지지율 '반토막' 수준으로…'민심 이반' 심각, 왜?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2022년 3월 9일 실시된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단 0.73%p 차이라는 역대 대선 최소 득표율 차로 꺾고 첫 공직선거 출마에 바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운 윤석열 대통령. 그런데 임기 반환점을 돌기 전부터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하더니 지지율이 48.56%를 얻어 당선됐던 득표율의 반토막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고 보면 민심이 얼마나 많이 돌아섰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오죽하면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민주화운동의 원로 인사들이 대놓고 정권의 실정을 규탄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나섰을까. 이반된 민심의 심각성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 국민들에게 시국선언이란 말은 그리 낯설지 않다. 당면한 현 정세에 자신의 주장이나 뜻을 널리 펴서 알리는 광의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임에도 우리는 위중하고 어려운 시기에 자주 이 말을 사용하고 들어왔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시국선언은 시대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홀연히 시국선언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시국선언을 하는 주체는 종교계, 교수 등 지식 계층, 대학생, 시민단체 등 특정 직업군과 관련된 집단이 주로 참여했지만 원로들이 함께 나선 시국선언들도 종종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국선언은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4월 25일 교수 등 258명이 발표한 시국선언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 시국선언문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여야 의원 등이 부정선거와 유혈사태에 책임지고 사퇴할 것과 재선거를 시행할 것 등의 주장이 담겨 파장과 효과가 컸다. 

1987년에는 6월 민주항쟁 과정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국선언이 거센 정치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며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적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물꼬를 텄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많은 시국선언이 있었지만 2016년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번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시국선언’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많은 정치·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해결책도 나온다' 

2016년 12월 3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6차 촛불집회 모습.(자료사진)
2016년 12월 3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6차 촛불집회 모습.(자료사진)

당시 대학생들로 구성돼 시작했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박근혜 대통령 퇴진 시국선언’에는 교수·시민단체·종교계에 이어 빈민과 비정규직, 장애인 등 다양한 계층이 동참했다. 이처럼 시국선언이 나올 때마다 ‘민심이 천심이다’란 말을 되새겨 주었다.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해결책도 나온다는 당연한 진리를 외면하면 분노는 커지기 마련'이라는 교훈도 함께 던져주었다. 

그런데 올 추석 명절 밥상머리 민심은 ‘도처에 산재한 불안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게 주된 화두였다. 고물가와 의료대란에 이어 폭정으로 인해 삶이 힘들고 팍팍하다는 푸념과 볼멘소리가 넘쳐났다. 여기에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혐오에 따른 한숨이 더해지면서 명절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무엇보다 이번 추석 민심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였다. 특히 대통령 부인인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디올백 문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서울-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 '관사 개입 논란', '총선 개입 의혹' 등 숱한 논란과 의혹에도 이를 바라만 보는 대통령의 '모르쇠'와 '불통'에 대한 민심이 가장 싸늘했다.

이를 반영하듯 시민사회 인사 1,500여명이 서명하고 각계 원로들이 나서서 외친 시국선언에서도 김 여사 명품가방 수수 논란, 의정갈등 장기화로 인한 의료 공백, 독립기념관장 ‘뉴라이트’ 인사 논란을 비롯한 역사 인식, 공영방송 장악 시도 등을 현 정권의 문제점으로 짚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주엔 부산 도심에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내걸고 야당과 시민사회 등이 결집하는 대규모 시국대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 시국대회에서는 잇단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 김건희 여사 관련 각종 의혹, 역사관과 불통 논란 등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백명이 참여하던 정권 퇴진 집회와는 다르게 수천명이 참여할 것이란 예고도 나온 것을 보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박근혜 탄핵’ 외치던 무렵, ‘군주민수(君舟民水)’ 올해의 사자성어 선정…이유는?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성난 민심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광장에 나선 결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로 통과된 상황을 빗대 그해 교수신문은 ‘군주민수(君舟民水)'를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이 사자성어는 <순자>의 ‘왕제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니, 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민심을 바다에 빗대는 것은 오래된 비유다. 그런데 ‘군자주야 서인자수야 부수소이재주 역소이복주(君者舟也 庶人者水也 夫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란 공자(孔子)의 말에서 유래된 이 성어를 최근 다시 떠오르게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오의해(五儀解)'에 나온 이 말은 공자가 노나라 애공(哀公)과 '참된 군주의 자세'에 대해 논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다. ‘군주는 백성이라는 물 위에 뜬 배’에 방점을 찍는다. 물이 고요하면 배는 항해가 수월하지만 물이 거세지면 배는 뒤집어질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결국 민의를 거스르는 정권은 배가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이 때문에 위정자들에게 민의를 잘 읽어 국민의 뜻에 거스르지 말라는 경계의 말로 자주 인용된다.

호랑이 등인 줄 알았던 민심이 오히려 그를 덮치는 바다와 같은 형국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선 후보 시절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세로 대세론을 만들던 윤석열 대통령이 처한 지금의 모습이 이와 유사하다. 임기 반환점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좌초 위기에 내몰린 양태다. 국민은 피통치자로서 힘의 수용자지만 민심이 여론으로 모일 때는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무섭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결코 가벼이 들어서는 안 된다. 

/박주현 기자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