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선비들만 책을 아끼고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내와 누이와 딸들도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베꼈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여성, 즉 우리의 할머님들도 책을 사랑하였다. 그분들은 서로서로 책을 빌려주기도 하였고, 한자리에 모여 누군가 낭랑한 음성으로 소리 내어 읽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집에도 할머님들의 손때가 묻은 소설책이 여러 권 남아 있다. 본래는 산더미처럼 수북하였던 것을, 고소설을 연구한다는 대학교수님들이 빌려 가시고는 되돌려주지 않으셨다(1970년대의 일). 아직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소설책은 10여 권쯤 된다. 이 모두가 할머님들이 필사하신 것으로 <<명주귀봉(명주기봉)>>이란 소설책이 대부분이다. 

"잘못 적은 글귀와 빠진 글자도 많을 것...잘 헤아려서 읽어주세요" 

책의 앞뒤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중에는 고조모님 전주이씨와 증조모님 영월신씨가 남긴 간단한 글귀도 있고, 또 조모님 밀양박씨가 적은 글도 있다. 책을 언제 누가 필사하였다든가, 빌려서 본 사람은 곧 되돌려 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소설책을 읽고 베낀 독자로서 자신의 감상을 간단히 적어둔 것도 있다. 오늘은 고조모와 증조모께서 남기신 짧은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명주귀봉>> 제2권 말미에 고조모께서 이렇게 기록하셨다.

“셰자 을츅 원월 열오일 등츌 책주 이씨라.”

그 뜻은 을축년 정월 십오일에 베껴썼다. 이 책의 주인은 이씨라는 말씀이다. 을축년은 1865년, 즉 고종 2년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글귀의 끝에는 책 주인을 “신씨라”고 다시 적었다. 신씨는 우리 증조모님이신데, 자신의 어머님인 전주 이씨로부터 이 책을 물려받은 것이다. 책을 직접 필사한 고조모님은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사본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발견될 수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당부의 말씀을 하였다.

“오셔 낙자 만ᄒᆞ오니 00눌너 보옵쇼셔”

“잘못 적은 글귀와 빠진 글자도 많을 것입니다. 잘 헤아려서 읽어주세요.” 대강 이와 같은 뜻이다. 대체로 소설의 필사는 농한기인 겨울철에 가능한 일이었다. 1865년 정월에 제2권을 필사하시고, 그다음 달 2월 초순에 제3권도 필사를 마치셨다. 그래서 우리 고조모님은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으셨다.

“셰자 을츅 이월 초사일 필사라”

풀이하면 을축년(1865) 이월 초사일에 필사하였다는 뜻이다. 3권을 옮겨 적으신 뒤에 고조모님 전주 이씨게서는 간단한 소감을 적어놓으셨다.

“심은 수란 즁이나 이 책이 ᄒᆞ신긔하기로 변츌힐이 질여길두고 보고 민깰치다라 유자자젼젼반칙이라”

전주 이씨의 '명주귀봉' 필사기 일부.(백승종 제공)
전주 이씨의 '명주귀봉' 필사기 일부.(백승종 제공)

글의 뜻은 대강 아래와 같다. “내 마음은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그러나 이 소설 책이 워낙 신기하기 때문에 필사하노라. 오래오래 곁에 두고 읽으면 좋겠다. 많은 깨침이 있더라. 자자 손손 대대로 전해주기를 바란다.” 과연 이 말씀대로 이 책자는 고조할머님의 딸인 영월 신씨와 그 며느님인 밀양 박씨를 거쳐 필사자의 현손인 나의 대에 이르렀다. 고조할머님의 뜻은 이뤄진 셈이다. 고조할머님은 그해 이월에 필사를 계속하여 제4권도 마치셨다. 책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어놓으셨다.

"실곡다셰 상사라음니 무론 남녀귀쳔허고..."

“셰자 을츅 이월 십육일 필셔하다”

을축년 이월 십육일에 필사하셨다는 말이다. 이어서 당부의 말씀을 다시 꺼내셨다.

“글시 넉넉잔하압 황모할제 만헌이/ 부인소졔보고 책지말의로세 책주 이씨셔”

이 무슨 뜻일까. “글씨도 시원하지 못하고 거칠고 잘못됨이 많을 것이다. 부인과 소녀들은 실수를 발견하고 나를 꾸짖지 마소서. 책의 주인 이씨가 씀” 필사한 자신을 탓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이 글에 이어 책의 주인이 “신씨라”고 다시 적혀 있다. 필사자의 따님인 우리 증조모가 나중에 추가로 기록하신 것이다. <<명주귀봉>>의 넷째 권을 되풀이하여 읽으신 다음에 우리 고조모님은 다음과 같은 서평을 붙여놓으셨다.

“이 글시을 보온직 빈독에 필이 나작이 주옥이요 획획이 생힘어라/ 일노조차 탄복하여 두어자 적사이 보시난 쳠군자난 마암을 온젼이 하여 착실이 보시압소셔/ 봉산산인 소헌은 근셔하노라.”

부족한 내가 헤아려 볼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아니었던가 짐작한다.

“이 소설을 읽어보고 또 자주 읽으면 반드시 글귀마다 주옥이요, 한글 자 한글 자의 뜻이 생생하도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탄복하여 두어 자를 기록하니, 보시는 모든 분께서는 마음을 온전히 하여 착실히 읽어보시옵소서. 봉산산인 소헌은 삼가 적어두노라.”

뜻이 좋은 양서라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면서 독자들에게도 소설의 내용을 정성껏 음미하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끝에 고조할머님께서는 자신의 호와 이름을 “봉산산인 (이)소헌”이라고 밝히셨다. 그랬구나. 그분은 여성이지만 스스로 한 사람의 선비로 여기셨던 것이고, 당당하게도 자아의 정체성을 후세에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고조할머님께서는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소개하실 필요를 느끼셨던지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덧붙여 놓으셨다.

“실곡다셰 상사라음니/ 무론 남녀귀쳔허고/ 난세화복은 닌지상사라/ 닐월셩신도 한본 재앙을 피치 못하거던/ 허물며 사람니리요/공쥬은 만승쳔자으 쳔춍을 어더 하지 옥엽니로되/ 현자의 하가하야 부덕을 높피잡아/ 젼젼유환 자덕을 두엇거던/ 허물며 우(리)미쳔쵸토 닌생니야/ 감니 완심을 가자/ 부도을 바리니요/ 비록 언셔 고담니나/ 보시난 부닌쇼져 허슈니 고담으로 보지 말고/ 붑마니럿/ 탈퓌려 하되/ 공쥬흐 금도 컷셔미/ 전고유환생한 부도을 자바/ 죠금도 단죠리미 업심을 본다두소셔”

"전생의 인연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 부녀의 도덕을 갖추었도다"

이상은 고조모님 전주이씨의 독서 감상인데, 내가 그 뜻을 풀어보면 이러하다.

“곡절을 잃고 고생하는 것이 세상에는 늘 있는 일이다. 남녀 귀천을 떠나서 난세가 되고 보면 화를 입거나 복을 누림은 누구라도 당하는 일이라. 천지자연도 큰 재앙을 피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작품에 나오는 공주는 전차를 만 개나 거느린 천자의 은총을 얻어, 세상에 다시 내려온 금지옥엽 참으로 귀한 몸이었다. 어진 선비에게 시집을 가서 부덕을 높이 쌓아, 여러 일을 겪으며 환난이 심하였어도 자비로운 덕성을 가지셨다. 하물며 우리같이 미천한 보잘것없는 인생은 어떠할까. 감히 완전한 덕성을 이룰 마음을 가져 부녀의 도리를 제대로 갖추기를 바라겠는가. 비록 이것은 한글로 쓴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나, 책을 읽는 부인과 아가씨들은 함부로 여겨서 그저 한낱 옛날이야기로만 보지 마시라. 잘못된 일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를 바라노라. 작중 인물 공주의 도덕심과 인격도 훌륭하였으니, 전생의 인연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 부녀의 도덕을 갖추었도다. 그에게는 조금도 쉼과 막힘이 없었음을 본받으소서.”

고조모님은 이 책의 필사를 그대로 계속하지 못하셨다. 제5권의 필사를 마친 것은 이듬해인 병인년(1866, 고종 3) 정월 초육일이었다. 3월 이후에는 집안의 농사일이 분주하여 한가하게 책을 베낄 수가 없으셨다. 책의 맨 뒷장에는 다시 필사에 잘못이 많이 있더라도 양해하기 바란다는 구절이 나오고, 책의 주인이 이씨부인이라는 점도 명기되었다. 물론 그보다 한참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따님이신 “신씨”가 책의 주인이라고 기록하였다.

제6권의 필사는 비교적 순조로워 병인년 정월 12일에 마쳤다. 5권을 마친지 불과 엿새만에 한 권을 다시 필사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7권은 제6권보다 이틀 앞서 필사가 끝났다.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고조모님은 책의 순서를 바꿔서 베낀 것이었다. 제7권의 끝장에 고조모님께서는 “책주 일정동 완산이씨”라고 적어놓았다. 전라도 부안의 일정동에 사는 전주이씨라는 뜻이다. 이 짤막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증조모님 영월 신씨 일가가 부안의 일정동에 사셨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훗날 이 책은 따님인 영월신씨를 거쳐서 다시 그분의 따님인 수원백씨, 정확히 말하면 우리 조부님의 누나가 한글을 배우는 교과서가 되었다. 그런 사연이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책주 백소제 십삼서어 잇책으로 배...” 요컨대 이책의 주인은 “백소저”요, 13살에 이 책으로 글을 배웠다는 뜻이었다. 그 사이 고조모님은 <<명주귀봉>>에 완전히 경도되어 제8권의 필사도 병행하고 계셨다. 아마도 주야로 필사에만 매달리신 듯하다. 병인년 정월 10일에 7권과 8권의 필사를 모두 마치시고는 이런 말씀을 추가로 덧붙이셨다.

“황모ᄒᆞ온이 눌너 보옵소셔 글시 변변치 못ᄒᆞ오 .../승상의 관흥 관흥대덕은 흠모ᄒᆞ여 00ᄒᆞ여 ... 내질에 길이 젼ᄒᆞ 이 모의 필젹을 허수이 생각말고 잘 간수ᄒᆞ여라 유자자 젼젼 반칙ᄒᆞ라”

대강 이런 뜻이었다. “필사가 거칠다 해도 헤아려 보시기 바란다. 글씨도 변변치 못하오나 그러한 부탁을 드린다. 책에 나오는 승상(정승)의 관흥과 대덕을 흠모하노라. 이 책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이 모(母, 전주이씨)의 필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부디 잘 간수하여라. 자손이 있으면 대대로 물려주거라.”

자신의 글씨, 자손들이 소중하게 여기기를 당부

우리 고조모님은 그해 정월 14일에 <<명주귀봉>>의 제9권까지 필사를 마치셨다. 그러나 이후로는 다른 일이 바쁘셔서 필사를 계속하지 못하시고, 다시 이듬해인 정묘(1867년, 고종 4)년 봄에 드디어 제10권도 필사를 끝냈다. 그런데 그때는 “모춘 모월 등서”라고 하여 마친 날짜를 정확히 기록하지는 않으셨다. 이것으로 <<명주귀봉>>의 필사는 일단락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소설책의 첫권을 고조할머님이 언제 필사하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물론 짐작은 할 수 있다. 제권을 필사하신 것이 을축년(1866) 정월 15일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보다 열흘쯤 전인 정월 초에 마치셨을 것이다. 농한기마다 3년에 걸쳐 이어진 대장정이었다.

우리 고조할머님께서는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글자도 나올 수 있고, 실수로 본문을 빠뜨린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면서도 자신의 글씨를 자손들이 소중하게 여기기를 당부하였다. 아울러 책의 내용이라든가 등장인물에 관한 자신의 소감을 기록하고, 독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부안 일정동에 살고 있는 “봉산산인 이소헌”이라는 여성 선비로서의 자의식도 뚜렷하셨다. 조선의 여성도 여느 선비처럼 지식을 소중히 여겼으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강렬하였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알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인쇄된 소설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출판 비용 때문에 너무 짧아서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 그래서 책을 사랑하는 여성은 대개 장편 소설을 필사하였다. “필사”는 말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나, 무조건 베낀 것은 아니었다. 책의 내용을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였으며, 표현을 바꾸기도 하였다. 필사란 곧 공동 창작의 한 방법이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할머님들이 필사를 한 것은 곧 그 나름의 창작행위에 참여하신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