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49)

호남제일문수도량으로 불리는 고창 문수사의 대웅전이 뒤늦게나마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지정작업이 마침내 완료되었다. 이로써 태효 주지스님 보임이래 국가 보물 3건, 천연기념물 문수사 단풍나무숲 1건으로, 4건의 국가 지정문화재 보유사찰이 된 것이다. 민선7기인 2020년 5월 문수사 대웅전 국가 보물승격을 위한 자료축적과 가치제고를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전북도와 협력하여 지정절차를 수행한 결과 4년만에 보물이 된 것이다.

문수사는 이미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일괄에이어 보물 3점을 보유한 명실공히 유서깊은 전통사찰로서 격을 갖추게 되었다. 앞으로는 무형의 자산들, 노사 철학을 완성한 문수사, 호남의병사령부 문수사, 만해스님도 다녀가시던 문수사 등의 정신문화적 가치도 조명되면 좋겠다. 뜻깊은 보물승격 작업을 초지일관 추진해오신 태효주지스님과, 백년전인 1924년 중창불사를 가능케 한 대시주 오연필과, 도편수 유익서의 공덕을 특별히 기록해두고자 한다.

이번에 보물지정된 대웅전은 그 이전부터 붕괴위험이 있었으나 재정문제로 손을 대지 못하다가,고창부호이던 전 참봉 동복오씨 오연필(吳然必 1863~1944)의 대시주로 1924년에 네 번째의 중창불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실내 기둥이 없고, 팔작지붕에서 맞배로 변형되는 등 특이한 건축양식과 형태의 대웅전 전면해체 보수공사시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여 보물을 탄생시켜주신, 호남 제일대목장이던 무송유씨 유익서(1882~1944 )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고창지역에서 흔히 오참봉이라 불리던 동복오씨 오연필은 자가 국서(國瑞), 호가 금호(錦湖)로서, 28세에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을 제수받고, 43세에 기자릉참봉에 임명되었고, 관직이후에는 고창 금융조합을 세우고 초대조합장을 지냈다. 고창고보 설립시 많은 재정출연과 주위의 어려운 분들 구휼에도 힘써서 시혜불망공덕비, 금융조합장 송덕비가 전해온다.

대타로 나와 '만루 홈런' 친 유익서와 문수사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여 문수사에 들어가 성속을 초월하고 삭발수도를 하기도 했다. 기울어 가는 대웅전 중창비 전액을 시주하였고, 마침 불사하던 해에 회갑을 맞았는데도, 불사에 전념해야 한다고 회갑연도 미뤘다 한다. 대웅전 낙성기념으로 대형불화도 대웅전에 봉안했는데, 주지스님은 감사표시로 오참봉 초상화를 대웅전에 모셨다 한다.

아쉽게도 이 불화와 오참봉 초상화도 훗날 도난당해 지금은 모두 없어져 아쉽다. 후손들 전언에 따르면 외국에 팔려나갔을거라 한다. 오참봉의 후손으로 일본유학후 고창여고 교장으로 평생 육영사업을 하시고, 고창오거리당산제 초대회장, 고창문화원 초대이사 등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해온 교육자 오성탁 교장이 그의 손자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시절에 규모있는 한옥을 짓는 총책임자 우두머리 목수인 도편수로 호남제일대목으로 날리던 대목장이 유익서였다. 보천교 총본부 차천자궁을 비롯하여, 사찰, 행세하던 명문가들의 사우나 정자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무장면 덕림리 용오정사를 지으면서, 일부러 S자모양으로 구불어진 기둥만을 골라다 지은 홍의재를 보면 그의 신들린 듯한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수라면 재목 탓, 연장 탓을 하면 안된다. 어떠한 재목이 주어지든 이토록 아름답게 짜맞출 수 있어야 장인이다"고 말하는 듯하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빼어난 재주는 모자란 듯하다)의 경지를 보는 것 같아, 필자는 한국 한옥건축의 백미라고 평가한다.

고창토배기 성씨인 무송유씨 유익서의 본명은 진현(晉鉉, 아명은 창현暢鉉)이었고, 익서(益瑞)는 자인데 주로 익서로 부른 것 같다. 무송유씨 집성촌인 성송면 낙양마을(본디 소라모양의 명당마을 터라는 뜻의 나형기螺形基였는데, 부르기쉽게 냉기로 변했다가, 발음이 유사하고 뜻이 좋은 낙양洛陽으로 바뀜)에서 유희충(庾喜充 1846~1901)의 아들로 1882년 태어났다. 모친 함열남궁씨 (1858~1900)와 사이에 둔 1남2녀의 장남이다. 20세 이전 미혼기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22세때 고수 양지촌 이천서씨와 혼인하였다. 목수일은 외조부의 권유로 주로 외삼촌인 남궁 련(南宮 鍊)에게 크고 작은 한옥건축 기술을 고루 배우고 대목장이 되었다. 그의 수제자는 집안 일가인 유장봉(庾長鳳)이다. 고창 근동에서 숨은 재능으로 알려진 과묵하고 성실한 대목 유익서가 그 진가를 발휘한 작품이 1924년 현재의 문수사 대웅전을 해체보수한 일대사건이었다.

당시 대웅전은 1835년 다시 지은지 백여년이 가까이 되었고, 부실하여 중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서편인 앞쪽으로 무게중심이 5도이상 이미 기울어서, 전체적 해체보수가 시급하였으나 돈이 없어 미루어오다가 불심이 깊은 오참봉의 대시주로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당초 사업을 주관하던 신현국 주지스님의 속가 일가인 고흥 대목장 신대식이 도편수, 유익서가 부편수였다. 전면 해체후 재조립과정에서 긴 들보인 장량의 아귀를 며칠째 맞추지 못한 도편수의 실력이 들통나서 목수들의 신뢰를 잃게되자, 일가 주지스님 보기도 민망하게 된 신도편수는 야반도주 해버리고 만다.

한국 최대 한옥...보천교 천자궁을 짓다

졸지에 유익서가 대타로 도편을 잡고 지은 첫 작품이 이번에 백년만에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그가 도편이 되어 살펴보니 대부분 사찰건축 양식이 남북국시대이후 고려초기 건축양식인데, 이 건물은 건물내부 기둥이 없는 특이한 구조의 주심포 양식임과 중창과정에서 팔작을 맞배지붕으로 변형한 구조를 정확히 진단하였다. 굵은 칡넝쿨로 주리를 틀면서 매질하여 짜맞추는 기지를 발휘하여 긴들보 짜맞춤을 성공하자 목수들이 탄성을 지른다. 야구로 치면 대타로 나와서 만루홈런을 친 격이다. 이 사건으로 그의 문수사 대웅전 도편수 성공담이 주변에 회자되면서, 일약 호남제일대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4년 당시 그의 나이 42세로 27년동안 연마한 솜씨가 물오른 절정기의 작품이다. 말수가 적고 겸손한 성격탓에 나서지 않는 그에게 도편수가 주어지자 잠재기량을 실컨 발휘한 것이었다. 문수사 대웅전 이후에도 사우건물중 화려한 궁중건축 양식이 많이 보이는 무장 덕림사 용오정사를 지었고,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많은 사찰, 청사 등 큰 공사를 하던 대목장이었다. 한옥건축사상 최대최고의 건축인 정읍 입암의 차경석 차천자궁이라고도 부르는 보천교의 십일전 등 궁궐공사에 참여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가장 많이 지원하는 등 일제강점기 종교단체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 서훈자를 배출한 보천교를 탄압하면서, 교주 차경석 사후에 일제가 천자궁도 해체하고 궁전을 헐어서 헐값에 팔아치웠다. 오늘날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되어버린 보천교 중심궁궐인 십일전 등 천자궁은 1924년부터 5년동안 총규모 600칸을 궁중양식으로 지은 대역사였다. 이 공사는 연장자인 경상도 대목 변경재가 도편수, 고창대목 유익서가 기술담당 부편수, 부안대목 심사일이 목수담당 부편수를 맡았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높고 큰 최고한옥이라 하는 궁중양식 건축에서 유익서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호남제일대목장 유익서, 고향에서도 잊혀지는 거장의 걸작들

안타깝게도 2012년 불타버린 옛 내장사 대웅전도 보천교 전각중 정문인 보화문이 이축된 것인데, 잿더미로 사라져버려 사진으로만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한옥미를 보아야하다니 아쉽기만 하다. 이밖에도 고수 예지마을 이상기씨 호화정자인 세한정과 솟을대문, 안채, 성송면 무송리 무송유씨 재실 여송재와 솟을대문, 성송면 향산리 무송유씨 재실 영모재, 대산 율촌 정세환의원집 정자 등 고창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밖에도 호남 부자들의 사우, 정자, 사찰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데 전모를 다 조사한 게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한 세대를 주름잡은 한옥건축의 명장 유익서, 고창에만 국가보물1건, 도유형문화재 1건, 두개의 문화재와 조계사 대웅전 등 화제의 걸작들을 많이 남긴 위인이다. 그러나 정작 무송유씨 집안 족보에도 이런 업적은 한 줄도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관직경력위주 족보편집 관행상 그리했을텐데, 앞으로는 이런 다양한 업적들도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으면 참 좋겠다. 그의 일가인 유병회 교장께 제공받은 족보상의 묘소 정보를 찾아 후학으로서 술 한잔 올리고자 했으나, 유익서 선생 묘소는 종적을 모르겠고 이미 처족인 이천서씨들 묘소가 차지했다.

처가 발복해버렸는지 묘소나 후손들 행방이 묘연하여 아쉽기만 하다. 혹시 유익서 대목장 관련 추가 정보나 기록을 아시는 독자제현께서 제보해주시면 고맙겠다. 기록하고 기억하고 뜻을 주지 않으면 이토록 찬란한 업적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이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호남제일대목으로 날리던 유익서 대목장과의 만남이었다.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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