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44)

2019년 7월 16일 의향 고창에서 우선 진주하면 진주성 혈전이 떠오르는 진주성 국립진주박물관을 가는 길이었다. 430여년의 역사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선조들의 음덕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으로, 역사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부여하는 의미여야 한다는 자각이 들면서 사뭇 숙연해졌다. 2018년 11월 무장읍성 복원 과정에서 무기고 터에서 완벽한 원형으로 11기나 대량출토된 조선의 최첨단무기 비격진천뢰를 우선 과학적 보존처리와 기초연구를 마치고,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첫 전시개관을 하면서 문화재청장과 사무를 위탁한 출토지 군수를 초청하여 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43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고창의병을 이끌고 진주성혈전에 출병하신 은재공 유한량(劉漢良 1530~ 1593) 선조가 죽으러 달려간 길이었다. 무장현감 은재공 할아버지 후손인 내가 450여 년만에 고창군수가 될 수 있었던 일, 무장읍성 복원을 그렇게도 염원했던 일, 하필이면 수백년간 묻혀있던 비격진천뢰가 내가 군수가 되자 출토된 일, 고창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가 임진왜란과 전쟁사 전문연구기관인 진주박물관에 조사연구를 맡긴 일 등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선조들 덕분에 오늘 내가 있고, 우리나라와 역사문화가 있는 법이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얽히고 섥히며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는 발전하는 법이니, 누가 감히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다. 한반도첫수도의 문화유산과 높을고창 의향의 얼을 더욱 감사하게 보살피고 챙길 일이다.
무장현감 출신 은재공 유한량의 진주성혈전 순국

호국보훈의 달 첫 날이 의병의 날이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나라를 구하고자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의병사는 세계사 어디에도 없는 일, 한국사의 빛나는 눈대목이다. 임진왜란 당시 3대첩이나 주요 승전은 대부분 호남의병들의 활약이었다. 의향고창의 수많은 선조들이 임난 3대첩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임진정유왜란시 채홍국, 고덕붕의 흥덕회맹단 창의는 지난번 장흥고씨 파리장서 독립운동편에서 언급하였다. 진주성 순국 의병장 강릉유씨 유한량, 이순신 장군진영 수군에 참전한 함양오씨 사호공 오익창, 행주대첩 참전 청도김씨 김응룡 의병장을 호국보훈의 달에 소개하고자 한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국한 무장현감 출신 의병장 은재공 유한량은 조선개국공신 대제학 옥천부원군 유창(劉敞)의 증손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용모가 훌륭하고 절개가 있었다. 일찍부터 덕망이 있었다. 당시의 모든 벼슬아치들과 유생들이 존경하였다. 효성으로 천거되어 돈녕도정, 무장현감에 제수되었다. 정사가 간이하였고 모든 사람을 편하게 대하였다. 청백하다고 조야에 알려졌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무장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모으고,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를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거제현감 김준민, 해미현감 정명세 등과 함께 좌의부장 장윤의 의진에 나아가 참전하였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 2차전투 혈전 마지막날,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순성장을 맡은 장윤 휘하에서 혈전을 벌이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고창의 검암사에 배향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호남절의록, 비변사기, 선무원종훈, 임진창의동사록, 모양읍지 등 수록 )
유한량의 증조인 문희공 유창과 은재공 부친의 묘소가 서울 상일동 해천재(조선시대 경기도 광주)에 있다. 유한량의 진주 남강 순국 후에, 고창군 고수면 조산저수지 왼쪽 조산기슭 신선이 춤추는 소맷자락 모양이라는 선인무수혈에 의리장으로 모신 연고로 후손들이 고창에 세거하게 되었다.
무장읍성 복원과 비격진천뢰 출토 비사

전주시 문화영상산업국장 시절 김완주 시장을 모시고 전주한옥마을, 전주국제영화제, 영상위원회에 몰두하던 내가 전북도에 돌아와서 문화담당국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첫 국장시절 2003년 취임하자마자 무장읍성과 은재공 할아버지 역사복원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고창군과 '무장현 관아와 읍성정비계획'을 수립하고 문화재청 노태섭 청장, 훗날 문화재청장을 지냈고 평생 문화재청 일을 도와주신 당시 김종진 과장의 적극 지원으로, 2005년도에 발굴과 정비를 동시에 진행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착수되었으나 예산배정이 미미했다. 2006년 하반기 두번째 문화국장 당시 김춘진 국회의원의 노력으로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아 복원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후순위로 밀려난 무장읍성 복원을 앞당기려면 청장의 관심이 긴요하므로, 유청장의 현지방문 주선을 김춘진 의원께 간절히 요청드렸다. 성실성과 친화력이 탁월하신 김춘진의원께서 유홍준 청장과 문화재위원 전원을 부부동반 1박2일 일정으로 고창 무장읍성과 무장향교, 부안, 김제지역 문화유산 현장답사 일정을 만드셨다. 무장읍성의 가치와 복원필요성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유청장께서는 위원들에게 손수 송사지관 돌계단에 새겨진 연꽃, 청룡 백호 그림들을 설명하신 뒤에 무장객사 마루에 걸터앉기를 권하셨다. "위원님들 잘들 보셨지요. 무장읍성이 원형복원되면 가장 격조높은 조선시대 읍성을 하나 되찾게 되지 않겠어요?" 하는 말씀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로 복원사업이 탄력을 받아서 연차적으로 잘 추진되다가, 고창군수로 취임한 2018년 11월 훈련장, 무기고 주변발굴 과정에서 보물급 비격진천뢰가 무더기로 나왔다. 쾌보를 듣고 한 걸음에 무장읍성에 달려오신 정재숙 청장에게 발굴현장에서, 비격진천뢰 특별전시장에서 무장읍성 성벽의 완전복원, 무기고, 사창터, 동문 등 외곽정비 마무리사업 등을 챙기시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한국 문화유산 정비사상 최초로 발굴과 정비 동시추진 방식으로 진행된 무장현 관아와 읍성 원형복원 사업은 20여 년에 걸쳐 완공되어 그 위용이 드러났고, 가장 모범적 문화재정비 사례로 평가된다.
다량의 비격진천뢰의 출토는 호남우도 방어선 나주진관 체계에서 나주, 영광과 고창, 입암산성을 잇는 호남 해안방어의 요충이 무장읍성임이 확인되었다. 국가 양곡창고인 사창 중에서 최대규모의 무장읍성 사창터가 발굴 정비되어, 곡창인 무장현의 동원역량 위상이 확인되었다. 무장현감 출신 유한량의 의병시 군량인 의곡을 모았다는 기록, 김응룡 의병장이 무장현 곡식을 행주대첩시 군량미로 수송했다는 기록들과도 부합하는 초대형 사창터 확인이었다.
역사의 샘물을 마시며 물뿌리 돌아보기

유한량의 선무원종공신 보훈으로 장자는 일찍 죽었으므로, 차자인 유세형은 부여현감으로, 3자인 유세영은 낭천현감(현재 강원도 화천군)으로 임명되었고 후손들이 고창에 정착하게 되었다. 부여현감 후손들이 고수면 상평, 낭천현감 후손들이 아산면 상복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은재공 유한량은 당초 고창읍 정산사(당초 검암사)에 향사하다가 고수면 조산사로 따로 모셨다. 무장면 강남리 덕산단과 승유재, 장성 북이면 송산마을 송계서원에서도 모시고 있다.
2016년 8월 여름방학을 이용한 진주시 교사연수단이 버스 두 대로 고수 조산사를 방문하여 참배하였다. 진주대첩, 진주성, 촉석루, 의암 등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의 상징인 진주시에서 근원을 살펴보니, 순국의병 대부분은 호남의병이더란다. 진주성에서 순절한 유한량, 의암부인 주논개 의사의 남편 최경회 경상우병사 두 분이 무장현감 출신 의병이었다. 의향진주의 명성을 만들어주신 선열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주성 순국 의병장들의 고향 유적을 참배하는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하니 멋진 발상 아닌가? 조산사에서 현장안내 설명을 해준 유철중 전 전북대 교무처장에게 경남교육청 김익수 장학사의 답례문자가 왔다.


"제가 교사연수 고창 방문을 주도한 김익수 장학사입니다. 고창과 진주의 인연을 강단과 교사연수에서 자주 이야기합니다. 촉석루에서 은재공 선생님 공적을 기리며 향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593년 6월 29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진 장학사 한 분이 펼친 경남의 교육시책이 참 아름답다. 국정이나 지방정부의 수장이 애민사상과 역사의식만 뚜렷하다면 얼마나 멋진 나라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음수사원(飮水思源), 한 모금 역사의 물을 마시면서도 이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며 감사하자는 뜻일 터이다. 나를 있게하신 조상님들께, 살신성인 하신 의병들께 감사드리는 유월이다. 당신들이 계셔서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다'는 자랑이 생겼고, 의향 고창이 되었습니다.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