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으로

'언어의 정원' 영화 포스터
'언어의 정원' 영화 포스터

귀를 쫑긋, 눈은 번쩍

몇 달 전부터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이것을 취미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심스러워 먼저 사전을 검색해보았다. 

‘취미 :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3.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음, 이 정도면 취미라고 봐도 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래서 새로 생긴 취미가 뭐냐 하면, ‘ASMR 귀 청소 듣기’다. ASMR이란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자율감각쾌락반응)의 약자로,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을 말한다. 바람이 부는 소리, 연필로 글씨를 쓰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보통 광고에서는 연예인이 소곤소곤 속삭이거나, 해당 제품을 사용하는 소리(화장품 바르는 소리, 과자를 바사삭 먹는 소리 등)를 극대화하곤 한다.

여러 가지 ASMR 중에서도 내가 반복해서 보고 듣는 영상은 ‘귀 청소’다. 따로 폴더를 만들어 수십 개의 영상을 저장해 놓고, 피곤한데 잠이 금방 안 들 때 이불에 누워서 이어폰을 꽂고 재생하면 어느새 잠들어 있을 때가 많다. 진짜 누군가가 내 귀를 파 주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소중히 돌봄을 받는 느낌도 들고. 몸에서 긴장이 풀리면서 잠들기 편안한 상태가 되는 순간이 좋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은밀한(?) 취미를 도입부에 들먹인 것은, ‘언어의 정원’이 청각을 특히 깨우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전반적으로 비 오는 날씨가 주를 이루는데, 빗소리에 흠뻑 젖고, 뒤따라오는 피아노 선율에 한 번 더 흠뻑 젖는다. 국어 시간에 자주 배우던 ‘공감각적 심상’이란 것이 바로 이것인가 싶을 정도로 청각의 시각화, 시각의 청각화, 시각과 청각의 촉각화 등을 상영 시간 내내 정신없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초반에 나오는 공원 호수랄까 연못이랄까, 나무가 드리워진 수면의 풍경은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비로 인해 선명해진 자연의 색채와 공기가 한 손에 잡힐 듯한 표현력이 정말 놀라웠다. 실제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후 정밀하게 모사하는 방법을 썼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극사실주의 작화는 이게 진짜인지 그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사가 뛰어났다.

'언어의 정원' 중에서
'언어의 정원' 중에서

기술력도 기술력이겠지만, 그 순간순간을 포착하여 관객에게 어떤 부분을 어떻게 비출 것인가는 감독의 의도와 주관이기에, 잠들어 있던 온 몸의 감각을 깨워 그 모든 풍경을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어 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이전작인 ‘너의 이름은’이나 ‘날씨의 아이’를 볼 때도 느낀 것이지만, 하늘, 날씨, 기상, 풍경 표현이 정말 뛰어나다.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고, 훨씬 더 아름다우며, 보는 사람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색감과 움직임. 고요와 무언 속의 폭풍 같은 생동감. 어느 순간을 멈춰도 화보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각과 청각 외에도 비와 풀의 냄새, 맥주와 초콜릿의 맛, 차가운 공기와 따스한 체온의 대비가 애니메이션을 보기만 하는 것임에도 충분히 느껴졌다. 당신도 언어의 정원에 들어가 본다면 내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시궁창, 그래도 걸어가

'언어의 정원' 중에서
'언어의 정원' 중에서

‘언어의 정원’은 벌써 세 번째 개봉이다. 지인이 추천해주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관심 있는 작품이라 몇 년 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해 놓고도 미루다가 이번에는 관람에 성공했다.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타카오는 비 오는 어느 날 아침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공원 벤치에서 홀로 캔맥주를 마시며 안주로는 초콜릿을 먹는 여자. 그들만의 고요한 유대가 도쿄의 한여름 장마 속에서 이어졌다.

46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 속에서 앞서 말한 감각적인 영상미는 더할 나위 없이 풍성했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부분에서는 다소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꼭 그렇게 풀어나가야만 했나?’라며 엄청 낮은 별점을 준 경우도 보았는데,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이 시궁창이기에 상대적으로 서로를 몰랐을 때의 호기심, 설렘, 기대, 희망 그리고 그들을 이어주는 비와 풍경이 더 아름답게 반짝였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속 시원히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정이 있고 어떤 결말이 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노와 타카오가 서로에게 읊은 단가(만엽집)가 그들의 마음과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둥소리를 멀리서 들려주며- 천둥소리를 멀리서 들려주며

몰려오는 비구름아- 비구름 몰려오지 않아도

비라도 내려주렴- 나는 머물겠소

그대가 여기에 더 머물도록- 그대가 여기에 더 머문다면

'언어의 정원' 중에서
'언어의 정원' 중에서

27세의 여자와 15세의 남학생.

숨겨진 이야기.

비 내리는 공원에서 둘의 만남.

만약 이렇게만 헤드라인을 뽑아낸다면, 얼마든지 자극적인 가십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실제로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타인이라면 얼마든지 비난할 수도 있는 관계. 하지만 나이와 상황에 상관없이 둘은 서로에게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용기가 된다.

그의 꿈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그녀를 만나, 부족한 현실 속에서도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향해 묵묵히 정진하는 남자. 의도하지 않은 일로 인해 수렁에 빠지고, 있을 장소를 잃어버렸지만, 그를 만나 다시 한 번 세상과 마주하고 걸음을 내디디는 여자.

“지금까지의 내 인생 중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

마음이 통한 이와 함께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따뜻한 차를 마시는 그 순간, 차갑고 축축한 공기와 대비되는 안온한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둘을 감쌌다. 문득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몇 분 전의 혹은 몇 분 후의 분노와 슬픔, 좌절 때문에 그 순간의 행복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기에. 찰나더라도, 아니 찰나이기에 오히려 소중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한 번 해 볼까

'언어의 정원' 중에서
'언어의 정원' 중에서

언어의 정원 한줄평에서 이런 글을 봤다. ‘난 비를 싫어하지만, 언어의 정원을 보고 나서 비 내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고 싶어졌다.’ 여기에 덧붙여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는 원래 술을 마시지 않지만, 언어의 정원을 보니 캔맥주를 미치도록 마셔보고 싶네요!’ 싫은 것도 해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은 진정 예술의 힘인가 보다.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지금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언어의 정원’이 조금이나마 위로와 계기가 되어주면 좋겠다. 언젠가 이 비가 그치고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순간이 오겠지만, 비가 내리는 이 순간에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반짝이는 존재라고. 이 구두를 신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전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명주(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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