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전통에 빛나는 문화도시 프라이부르크가 어찌해서 생태도시로 출발하게 되었을까. 그 배경이 궁금할 수도 있겠는데, 한 가지 특이한 사건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빌이란 마을에 핵발전소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마침 석유 위기로 독일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기업가와 정치가들은 석유 중심의 화력발전에서 벗어나 초현대적인 핵발전소를 하나의 대안으로 여겼다.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라이부르크에는 이를 반대하는 지적 흐름이 강하게 형성되었다. 도무지 핵의 안전성에 관해서는 장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장래를 위협할 수도 있는 핵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이 많아, 핵발전소 반대하는 시민운동과 에너지 절약 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학생들과 다양한 반핵운동단체들이 뜻을 모았다. 여기에 도시의 중산층이라 할 보수층까지도 합세하여 반핵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시민들의 반대여론이 드높아지자, 독일 정부는 프라이부르크 주변에 핵발전소를 세우기로 한 획을 백지화하였다.
과연 핵은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79년 3월 28일,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의 스리마일섬에서 사고가 일어났는데, 핵발전소의 노심이 파손되는 사고였다.
만약의 경우에 작동할 안전판도 망가졌고, 여기에 발전소 측의 조작 실수까지 겹쳐 한때 발전시설이 폭발할 위기가 왔다. 이런 사고를 겪으면서 프라이부르크 시민들의 반핵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다시 1986년에는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초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자 핵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유럽 각국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프라이부르크에서는 도시 전체가 한목소리를 냈다. 정당의 경계를 넘어 시의회는 탈핵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정치가와 시민들은 대책 마련에 고심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생각 끝에 태양광 전기를 새로운 대체에너지원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프라이부르크 시청에는 독일 최초로 ‘환경보호국’이 설치되었다(1986). 이 모든 과정이 유럽을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프라이부르크가 이처럼 독자적인 에너지 정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우선 독일이란 나라는 지방자치제도가 발전해, 중앙정부의 간섭과 명령이 별로 대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의 대다수 시민이 핵발전소를 발전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또, 대학도시인 만큼 프라이부르크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다는 점도 한몫하였다. 그들의 높은 환경의식이 핵 문제에 관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흑림이라는 천연의 보고를 안고 사는 시민답게 프라이부르크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연환경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자각을 하고 있었다.
독일의 높은 기술 수준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덕분에 그들은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산업을 발전시키고, 개발하는데 이점이 있었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웬만한 문제는 기술적으로 해결할 전망이 있는 나라,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몇 가지 특징이 하나로 묶여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를 낳았다고 본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 (사우,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