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우리는 사회적 변화를 갈망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말을 걸어온다. 피케티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파헤쳤다.
그는 주로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2014년에 출간된 이 책은 기존의 경제이론을 뒤집기도 했고,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피케티의 역사적 성찰에 따르면, 자본소득은 노동소득을 능가했다. 쉽게 말해, 월급보다는 이자수익 또는 임대수입이 월등히 높았다. 현대사회에서 자본소득의 증가율은 연간 4~5퍼센트로 집계되었다. 그에 비해 노동소득의 증가율은 1~1.5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런 차이로 인하여 빈부격차는 갈수록 확대되었다. 부의 세습은 당연한 결과였다. 피케티는 시민들이 빈부격차의 고질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나아가 불평등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갖기를 촉구한다.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중산층이 사라지는 것은 필연의 추세이다. 그들은 결국 하류층이 되고 만다. 이것이 피케티의 통찰이다. 이미 극소수의 부자들이 세상의 자본을 독점하는 정황이 뚜렷하다.
피케티는 하나의 대안을 구상했다. 이름 하여, ‘글로벌 자본세’이다. 빈부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세금밖에 없다. 그래서 피케티는 소득세, 자본세, 상속세에 누진세를 강화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특히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가 각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지만, 21세기 세계의 재벌들은 지구를 배회하며 ‘조세피난처’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글로벌 자본세’라야만 효과를 낼 수 있다. 상식적으로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소득세나 상속세를 조금만 높이려 해도 조세저항이 만만치 않다. 하물며 ‘글로벌 자본세’이겠는가. 세율의 증가를 통해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피케티의 의지가 빛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현 가능성은 낙관하기 어렵다.
불평등의 문제는 국가 간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피케티의 연구에서도 재차 확인된 사실이지만, 18세기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동시대의 인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중국의 1인당 소득보다 크게 높지 않았다. 기껏해야 30퍼센트 정도가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어떠한가. 국가 간의 경제적 불평등이 사상 최악이다. 이런 문제는 또 장차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현실에는 이상사회가 결코 존재하지 않으나,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라 해서 말없이 수용할 것인가. 그러기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피케티와 바우만의 학문적 고뇌는 바로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신사와 선비에 대한 나의 역사적 탐색도 굳이 말하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으로 생각하는 전통의 가치를 함께 확인하고, 당면한 현안의 좌표를 역사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기를 바란다.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 지그문트 바우만
*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경제관료가 재벌에게 깊이 고개 숙여 절하는 모습이 가끔 언론에 포착됩니다. 그럴 때면 재벌은 선심이라도 쓰듯, 일자리를 얼마나 늘릴지를 발표하지요. 언론은 호들갑을 떨며 이제야 한국경제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는 조로 제창을 하기 일쑤입니다.
재벌이 재벌의 이익을 위해 투자를 하고, 사람을 더 뽑겠다는데 마치 경기의 구세주가 왕림하신 것처럼 태도들이 융숭합니다. 한국경제가 그렇게 해서 간단히 살아나는 것일까요?
오죽했으면 정부의 고관이 두손을 맞잡고 읍소하였을지도 상상이 되기는 합니다만, 아닌 것은 아니지요. 바우만의 언명처럼 저는 우리사회가 현재로서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벗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