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김성희 (사)정치발전소 상임이사

김성희 이사
김성희 이사

“더 강한 시민적 토호가 지역당의 모습으로, 결사체의 모습으로 지방정치에 위풍당당하게 나설 때, 지방에서의 민주주의는 더 강해지고 토호문제를 비롯한 지방문제의

해결점을 찾게 될 것”

1. 토호문제의 기원

토호(土豪)는 지방을 의미하는 토(土)와 갈기를 곧추세우고 무리를 이끄는 위풍당당한 멧돼지를 의미하는 호(豪)를 어원으로 한다. 말 그대로, 토호는 “중앙권력에 호락호락하지 않는 토착화한 재지 지배세력”을 지칭한다. 토호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것은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를 추구한 조선시대부터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중앙의 지방지배에 반발하는 일부 중소지주층을 ‘토호’로 규정하고 다양한 억제책을 썼다. 그러나 토호 억제책은 번번이 실패했다.

토호의 저항도 있었지만, 문제는 토호보다 더 큰 권력자원과 대토지를 보유한 중앙권력 기반의 권문세가의 저항 때문이었다. 중앙권력의 지배질서에 내재된 폐단에 비해 토호의 폐단은 변죽에 불과했다. 토호는 조선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지배체제의 본질적 문제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결과였다.

2. 토호문제를 둘러싼 싸움

토호의 연원을 살펴본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토호를 말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 된지도 이제 30여년이 지났지만 토호문제는 여전하다. 천년에 걸친 토호의 굴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토호 청산을 말하려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의견은 분분하다. 막연하게 지역 기득권 세력을 지목하거나, 지방 건설족을 말하기도 한다. 지방 엘리트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토호를 재력과 영향력을 기반으로 지방사회 전반을 조종하는 미스터리한 지하정부처럼 묘사하지만, 정작 그 실체는 불분명하다.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이후, 적폐청산의 일환으로 토호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토호청산’과 ‘지방분권’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정당은 집권당이었고 민주당은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이제 토호 문제가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선거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들이 표명한 슬로건과 정반대였다. 민주당의 다수 단체장들은 자신이 가진 영향력의 지표로 ‘청와대 출신’, ‘대통령 직속 위원회 출신’ 등을 내세웠다.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영향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중앙권력에 기댄 지대추구행위일뿐 ‘토호청산’, ‘지방분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토호가 막후에서 지방정치를 좌우하고 공적 자산을 약탈

지방은 토호의 이전투구 장이 되든 말든 책임지지 않은 채, 오직 대통령 주변을 배회하며 영향력을 추구한 사람들이 선거 시기 ‘토호청산’, ‘지방분권’을 외치며 지방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관직만을 추구해 온 자신을 포장하는 알리바이이며 중앙권력의 줄을 잡기 위해 지방과 시민을 동원하고 소모하는 기망행위일 뿐이다. 설사 이런 이들이 운 좋게 당선되었다 한들 이들에게 지방 문제의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

토호 청산론은 음모론과 닮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캐스 선스타인은 음모론을 “어떤 사건이나 행위가 발생한 이유를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남 몰래 벌이는 책략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것”으로 정의한다. 마찬가지로 “토호가 막후에서 지방정치를 좌우하고 공적 자산을 약탈한다는 것”은 토호청산론의 기본 가정이다.

음모론이 확산될수록 공동체의 신뢰기반은 약해지고 정치는 더 양극화 되는 반면, 문제해결은 더 어렵게 만든다. 토호청산론도 그렇다. 늘 토호와 싸우겠다고 하면서도 변한 것은 없다. 토호 창산을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토호의 자장 내에 있었던 셈이다. 문제를 실체적으로 다뤘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토호를 비판하고 토호를 없애야 한다는 수많은 주장을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중앙권력을 향해 가고자 하는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 위한 공허한 구호이거나 경쟁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었다. 목소리만 크고, 비난의 강도는 높지만, 정작 문제 해결과 관련 없는 가짜 싸움이었다.

3. 민주적 토호론

다수 시민이 토호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지방정치가 한정된 자원을 공익적으로 배분하지 못하고 일부 세력이 독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는 다양한 시민의 이익을 중심으로 나눠져 있고, 누가 얼마만큼을 가져갈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필수적이다.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 등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우리는 늘 이런 갈등을 보게 된다. 이런 갈등을 매개하고 조정해 사회의 통합성을 유지하고 이익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것은 정치의 고유한 책무다.

정치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려면, 시민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율적 결사체들과 정당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시민을 대신해 정치과정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서로 인정할 수 있는 잠재적 공익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과 결사체의 기능이 약하면 문제가 생긴다. 돈과 영향력을 가진 특정 사익추구집단이 정치과정을 독점하고 모두에게 돌아가야 할 공익을 가로 챈다. 토호 현상은 이런 불균형이 지방차원에서 구조화된 결과이다.

토호보다 더 강하고, 시민에 기반한 더 좋은 토호들 양성해야

따라서 토호 문제는 토호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조직해야 하는 정당과 결사체들이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로 인해 정치과정이 특정 세력에 점유되고 이런 정치적 불균형은 결국 자원배분의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정당과 결사체의 취약함은 그대로 놓아둔 채, 현상만을 지적해 이를 토호의 문제로 규정해 왔다. 잘못된 진단에서 좋은 치료방법이 나올 수 없다. 토호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면 토호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허한 청산론이나 분권론 대신, 토호보다 더 강하고, 지방 시민에 기반한 더 좋은 토호들을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 이런 공익적 토호들은 정당과 시민들의 자율적 결사체이다. 더 많은 좋은 토호들이 정치과정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다수 지방시민을 소외시키는 소수의 사익이 공익을 농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치과정에 균형을 만들어야 자원배분 역시 보다 평등하고 공정할 수 있다.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시민의 이해와 요구를 더 촘촘하게 대표해 사회를 더 강하고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지방자치 혹은 지역 사회의 실체적 이익과 열정을 살리는 길은 실제 지역시민의 사회경제적 이해에 기반한 정당과 결사체가 힘을 갖는 진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풀뿌리 시민 정치라는 이름으로 지역 시민단체를 행정주변으로 불러 모은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 시민단체를 행정조직의 하청계열화하는 관치의 민영화를 넘어서지 못한다.

무엇보다 청와대 주변과 권력 언저리에서 영향력을 키운 관직 사냥꾼이 아니라 열정과 소명을 가진 지역당과 정치인이 지방의 시민들 속에 뿌리내리고 이를 통해 강해져야 한다. 이들에 의해 토호문제를 비롯한 지방문제에 자립적 대안과 능력이 발전해야 한다.

더 강한 시민적 토호가 지역당의 모습으로, 결사체의 모습으로 지방정치에 위풍당당하게 나설 때, 지방에서의 민주주의는 더 강해지고 토호문제를 비롯한 지방문제의 해결점을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허한 토호청산론, 관직 사냥꾼들의 지방분권론에 맞서 굳이 말한다면 나는 이것을 ‘민주적 토호론’이라 하고 싶다.

/김성희(사)정치발전소 상임이사 /<사람과 언론> 제3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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