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론

언론학자 리프먼(W. Lippmann)은 그의 저서 '여론(public opinion)'에서 ‘의사사건’(pseudo-event)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면서 '미디어의 조작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미디어를 정치 권력이 장악하지 않고 개인으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고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는 정보를 통제하지 않으면 이를 수용하는 공중은 자유스러운 토론 과정을 거쳐 옳은 여론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허구의 전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준 것이다.

또한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자신의 저서 '이미지: 미국 가짜사건에 대한 안내(The Image:A Guide to Pseudo-events in America)'에서 더욱 자세히 '의사사건'의 개념을 일러주었다.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고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실제 사건보다 대중매체에 보도되는 사건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의사사건’...더욱 잘 전달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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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을 다니엘 부어스틴은 ‘의사사건’, 즉 가짜사건’이라고 개념 정의했다. 그가 말한 ‘가짜사건’이란 항상 새로운 기사를 실어야 하는 언론이 만들어 내는 ‘의사사건’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사사건은 진짜사건보다 더 잘 정리되어 있고 진짜사건보다 더 잘 전달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사건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이미지와 환상'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진 그의 책에서 다니엘 부어스틴이 바라보았던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당시 사회 현상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4월 10일 처리지는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다니엘 부어스틴이 말했던 의사사건과 유사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역 정서와 전혀 맞지 않은 뜬금없는 공약과 재탕 삼탕 공약이 마치 처음 나온 공약처럼 포장지만 다르게 포장된 공약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아니면 말고식 발언으로 유권자들을 속이려다 상대 후보 진영의 고소 또는 고발로 들통이 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감언이설로 주민들을 속이려는 후보자들과 이를 액면 그대로 보도해대는 언론들 사이에서 유권자들의 판단과 선택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전국을 돌며 갑자기 많은 '선물 보따리'를 펼쳐 보이고 있으니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하필 선거철에 집중적으로 선물(공약)을 풀고 다니는 대통령의 민생토론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만은 않다. 더욱이 무려 19차례 진행된 민생토론회가 여당 표심에 불리하게 인식돼 온 호남지역은 아예 제외하고 다닌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를 의식한 듯 선거를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14일에는 20번째 ‘민생토론회’를 전남 무안군에서 호남지역 최초로 개최했다. 그러자 많은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남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갑자기 등장한 현란한 수식어와 '선물 보따리' 

3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에서 '미래산업과 문화로 힘차게 도약하는 전남'을 주제로 20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를 개최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3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에서 '미래산업과 문화로 힘차게 도약하는 전남'을 주제로 20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를 개최했다.(사진=대통령실 제공)

이날 윤 대통령은 전남 생활권 확장 및 광역 경제권 형성을 위해 ▲전북 익산~전남 여수 간 철도 고속화 ▲영암∼광주 ‘한국형 아우토반’ 초고속도로 건설 등 교통 인프라 확충 이행을 주로 제시했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양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까지 인용하며 호남을 강조하며 발전을 약속했다. 

이날 국내 주요 언론들은 “윤 대통령이 영암에서 광주까지 47km 구간에 약 2조 6,000억원을 투입해 독일 아우토반과 같은 초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는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서울은 물론 지역 언론들도 <호남에 선물 보따리 가져간 윤석열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윤 대통령 "호남 잘돼야 대한민국 잘돼"…'한국형 아우토반' 추진>, <윤 대통령 “’호남 없으면 국가 없다‘는 이순신 정신으로 전남 발전”> 등 현란한 수식어로 호남의 첫 민생토론회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이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를 하며 쏟아낸 정책 공약의 재원을 둘러싼 문제 제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역 현안 해결이나 감세·규제 완화, 개발 정책 발표가 토론회의 주된 콘텐츠로 자리 잡으며 ‘누가 봐도 총선용’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도 하다. 앞서 민주당은 "지난 5일까지 진행된 17차례의 민생토론회까지만 해도 총 925조원에 달하는 퍼주기 약속이 이뤄졌다”며 “불법 관권선거”라고 주장했다. 반면 대통령실은 “중앙 재정이 투입되는 것은 10% 정도”라며 "야당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그럼에도 총사업비가 무려 900조원이 넘는 개발 공약들을 내놓으면서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미 착수한 사업을 포장만 달리해 우려먹는 등 총선용 공수표를 무책임하게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다.

새만금 예산 대폭 삭감할 때는 냉랭하더니...‘묻지마’ 개발 공약 남발

김관영 전북지사가 지난해 11월 7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새만금 국가사업 정상화를 위한 전북도민 궐기대회에서 참석자들을 향해 큰절을 하고 있다.(사진=새만금비상회의 제공)
김관영 전북지사가 지난해 11월 7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새만금 국가사업 정상화를 위한 전북도민 궐기대회에서 참석자들을 향해 큰절을 하고 있다.(사진=새만금비상회의 제공)

이 대목에서 다시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지난해 새만금세계스카우트잼버리 파행 이후 책임론을 놓고 갑론을박이 정치권으로 확대되면서 급기야 새만금 관련 예산은 물론 전북지역 정부 예산이 대폭 삭감된 바 있다. 그러자 전북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들이 국회에 몰려가 대규모 집회를 하며 예산 복원을 요구했지만 당시 대통령과 대통령실, 정부는 냉랭하기만 했다. 지금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겨우 국회에서 새만금 예산들이 일부 복원되긴 했지만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중앙정부가 예비타당성조사 등을 통해 투자 적정성을 다시 따지거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등 복잡한 절차를 내세우며 국회 통과 예산 마저도 집행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대통령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꽉 막혔던 지역 현안들이 다 해결될 것처럼 개발 공약을 쏟아내는 것을 바라본 전북도민들의 심경은 어떨까. 

저절로 긴 한숨과 자괴감 속에 빠져들 수 있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 착잡하기만 할 것이다. 무분별한 감세 공약도 모자라 ‘묻지마’ 개발 공약까지 쏟아내며 모든 것이 금세 풀릴 것처럼 대통령이 공약하고 또 대부분 언론들은 이를 가감 없이 보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책임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선거철에 집중되고 있음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움직이고 발언하면 곧바로 실행될 것처럼 언론들은 받아 쓰는 형태가 의사사건의 전형으로 비쳐진다. 

문제는 마치 이 같은 사례를 아무렇지 않게 보도하는 언론들의 행태가 의사사건을 더욱 부추기게 하고 있다. “현대인은 매스미디어의 최면술에 걸려 정치의 본질보다 정치의 외형적 이미지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한 다니엘 부어스킨도 깜짝 놀랄 의사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선거철만 되면 곧잘 나타나고 있는 의사사건이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선거철 '의사사건' 감시·구별, 유권자들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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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거철에 의사사건을 잘 감시하고 구별해내는 것도 유권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사전에 충분히 구성하고 기획할 수 있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사사건은 진짜보다 더 설득력 있어 보이고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사사건이 상업적 논리나 권력, 거기에 주류 언론들과 결합하게 될 때 큰 파괴력을 가진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그동안 의사사건이 ‘사회악’이 될 수 있음을 앞서 많은 학자들이 일찍이 경고했다. 특히 '의사사건의 중심 인물은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교묘히 미디어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 내용에 우리는 더욱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언론을 장악하거나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권력 집단들은 그들의 현재적 지위를 위협하는 메시지를 유통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메시지를 더욱 조작하려 할 것이란 학자들의 주장과 예언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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