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론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살자.”

“대통령 앞에서 크게 말하거나 풍자도 하지 말자.”

“정당에 가입했다면 당 대표에게 쓴소리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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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모임에 갔다가 지인들끼리 나누는 대화 내용이 귀를 솔깃하게 했다. 오랜만에 만나 핍진한 감정들을 털어놓으며 나누는 대화 속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갈수록 많아져 삶이 팍팍하다’는 게 주된 화두였다. 이들은 아파서 병원에 가도 의사들의 집단 사직과 휴업 등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거나 대통령 참석 행사장에서 시민은 물론 국회의원까지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사지가 들린 채 밖으로 퇴장당하는 모습을 상기하며 기겁을 했다.

또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활용한 대통령 풍자가 단속과 규제의 대상이란 점에 아연했다. 그러더니 총선을 앞둔 정당들의 ‘사천 논란’에도 불구하고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 된다’는 ‘텃밭론’의 건재함에 대화의 목소리 톤은 절정에 달했다. 점점 감정이 북받쳐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대화장을 조용히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금지’, ‘검열’이란 두 단어가 큼지막하게 그려지며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처럼 ‘금지'와 '검열’이 난무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곱씹게 한다.

시대착오적 불신·불안 조성...‘공정’ 결여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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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증원을 놓고 정부와 싸우는 의사단체, 환자들을 등지고 거리로 뛰쳐 나온 의사들을 향해 ‘면허정지·구속‘의 엄포를 놓는 보건·사법당국, 선거구 획정을 놓고 꺾을 줄 모르고 마주 달리는 여야 정치권, 과잉 경호도 모자라 표현의 자유마저 꺾으려는 대통령 주변의 아부와 충성으로 똘똘 뭉친 권력 실세들, ‘공천’을 ‘사천’으로 휘두르며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정당들... 모두가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이기는 ‘치킨게임(chicken game)’을 하고 있는 듯하다. 

바야흐로 불신과 불안의 계절이 왔음을 알려주는 대목들이다. 그런데 모두가 시대착오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군사독재 시절의 망령과 복수·배반을 주제로 다룬 영화나 소설의 세계가 2024년 대한민국에 소환된 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시대착오적 현실의 근저에는 공정(公正)이 보이질 않는 점이 공통적인 현상임을 깨닫게 한다. 

‘공정’은 사전적으로 ‘어떤 일의 가치, 선악, 우열, 시비 등을 판단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한다. 그런데 공정이 무너지고 불공정이 판치면서 국민의 삶과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우선 의료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대 정원 문제부터 놓고 보자.

27년 동안 동결돼 온 의대 정원을 지방에 필수의사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2,000명을 연차적으로 증원한다고 발표한 정부 당국이나, 이를 적극 반대하는 의사단체나 어떤 가치가 우선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공유했다면 이렇게까지 극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의사가 환자들을 내팽개치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희한한 상황으로까지 내몰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특정 집단과 세력의 힘에 좌우된 그릇된 관행에서 기인한 ‘공정성 결여’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과잉 경호와 대통령을 향한 비웃음·조롱을 담은 SNS 풍자물을 지나치게 규제하고 차단하는 문제 또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와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가 공정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문제로 볼 수 있다. 불공정한 판단과 대응이 힘 있는 쪽으로 더욱 힘을 쏠리게 하면서 부작용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은 숱한 역사가 던져준 교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마음껏 풍자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마음껏 하라, 그것은 당신의 권리”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언론단체에서는 “대통령의 철학이 바뀐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경찰과 류희림 방심위가 알아서 굽신거리는 것인가”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이 또한 공정을 상실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불공정 공천...커지는 ‘불신·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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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총선을 코앞에 두고 거대 정당들의 공천이 불공정하다며 곳곳에서 탈당과 불복 저항, 심지어 복수를 위한 창당이 붐을 이루는 현상 앞에서 더욱 공정의 상실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공천에서 떨어지면 노선을 바꿔 적진에 투항하고,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하는 경우를 그동안 수두룩하게 보아왔다. 어찌보면 이들은 4년간 같은 색깔의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었을 뿐이지 완전히 같은 편이 아닌 셈이었던 것도 뒤늦게 알 수 있게 해준 것이지만.

그런데 최근엔 공천을 사천으로 휘두르며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게 더욱 노골적이다. 정당의 공천이 공정성을 잃을 때 사용되는 용어가 바로 '사천' 아니던가. 그런데 국민의힘은 물론 야당인 민주당에서도 사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공천 학살’이란 표현도 낯설지 않다. 

민주당의 한 5선 의원은 “자신을 비판했던 의원들을 모두 하위 20% 안에 포함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자행하고 있다”며 “개인의 방탄과 치졸한 복수만을 바라보며 칼을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할 정도다. 국민의힘에서도 경선에서 배제된 한 예비후보가 "공천관리위원회의 호떡 뒤집기식 결정은 '서천호 후보 구하기' 작전과 다를 바 없다"며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당을 향해 날선 비판을 날렸다.

당이나 당 대표에게 평소 쓴소리 잘하던 의원들이 공천에서 배제된 사례는 자주 목격된다. 특히 ‘특정 지역에서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라는 이른바 ‘텃밭론’을 내세워 위압적이고 고압적인 정당의 공천 과정이 불공정하게 치러지는 형국을 바라보는 유권자들은 씁쓸함을 넘어 참담하다는 반응이다.

유력 정당 경선에서 승리를 하면 본선에서 상대가 허약하거나 심지어 경쟁자가 없는 지역에선 당선으로 직결되니 그럴 만도 하다. '민주주의의 꽃이 곧 선거'라고 정치권은 늘 강조하지만 총선에서 선거란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있는 것은 바로 공정의 상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불공정 피해, 국민·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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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8조 2항에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돼 있음에도 민주적이지 못하고 공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불신과 불만이 창궐하고 있다. 급기야 당을 뛰쳐나가 창당하는 사례가 빈번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공직선거법에는 ‘총선 1년 전까지 확정하도록 명시한 선거구 획정’도 선거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까지 결정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공정하지 못한 발상과 제안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다. 선거구 획정 시한이 ‘데드라인’까지 지났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한치 양보 없이 ‘치킨게임’을 벌이는 양태다.

그런데 이 싸움의 실질적 패자는 그들 중 누구가 아니라 바로 유권자들과 정치 신인들, 군소정당 후보들이다. 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는 물러설 생각이 없고, 밥그릇이 달린 의료계 역시 물러서지 않는 ‘치킨게임’의 가장 큰 희생자는 환자와 가족들이다.

과잉 경호와 지나친 풍자 규제도 실질적 피해자는 바로 국민뿐만 아니라 피땀 흘려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공정’을 망각하거나 멀리했을 때 발생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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