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123)

마을 공동체에서 나온 농사의 개념을 꺼내본다. 조상들은 농사를 "하늘이 농부의 몸에 붙여준 팔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삶의 터전인 논밭의 착취는 농부가 팔,다리를 잃는 것이니 그것에서 분노가 쌓이면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농촌은 이웃 공동체다. 농사가 공동체 생존의 도구였고 논밭이 그 터전이었다. 그래서 마을에는 외지인의 논밭 소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가족의 노동력으로 경작해낼 수 있는 면적 만큼씩 나누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것의 실체는 마을 공동체가 골고루 농사를 잘 지어 살도록 농지 매매의 자율적 규범을 지켜내며 살아낸 것에 있다.
논밭은 한 마지기가 200평 정도다. 즉 한 마지기란 지금의 660제곱미터의 크기인데 씨앗 한 말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이다. 삼대가 한 지붕에서 살던 시절 가족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면적은 10마지기 정도였다. 한 마지기에서는 쌀 한 가마 내외가 수확 되었다. 땅의 비옥도와 농부의 부지런함이 수확량을 결정해 냈고 많게는 쌀 세 가마도 얻어낼 수 있었다.
농지는 수확량에 따라 논밭의 거래가가 달라졌다. 즉 한 마지기의 논에서 쌀이 한 가마 정도 수확된 논이라면 쌀 한 가마니 값에 5년간 생산량의 합이 그 농지의 매매값이 되었다. 5년이란 기간은 이웃 사촌의 합이 5호였던 5호작통법에서 나온 것이다.

즉, 다섯 집이 이웃사촌이 되면 굶어 죽는 사람 안 생겨난다고 했던 경험 때문이었고 논 한 마지기는 가족을 살려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출발 농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축해서 모은 돈으로 논밭 한 필지를 사게 되는 날은 하늘에서 팔다리를 하나씩 얻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논밭을 팔게 될 때도 반드시 같은 동네 사람 중 논밭이 없거나 적은 사람에게 팔았고 열 마지기 이상 가진 사람에게는 팔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을에 부의 계층이 생겨나면 공동체에 커다란 갑질 장애물이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여 논밭을 살 수 없는 가족에게는 마을 주변의 공한지 개간 우선권을 주어 논밭이 생겨나게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전답 이름은 각시배미, 또랑배미, 눈썹배미, 발톱배미 같은 가족의 사연을 담았다 그러하니 논밭은 농부의 가족이었다. 일제 강점기 토지의 지번 제도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논과 밭이 이름을 가졌다 생김새나 개간 할 때의 사연같은 것에서 따온 것이 논밭의 이름이 되었다. 그 논밭의 거래는 이름값으로 결정되지 않고 주인의 발품값으로 거래되었다 주인이 땅을 얼마나 기름지게 해서 곡식이 많이 나느냐와 집에서 거리가 논밭값의 기준이 되었다.

씨앗이골 각시배미 농사짓던 집 아들이 판검사가 되고 웃도랑골 눈썹배미 농사짓던 집 딸이 유명한 가수가 되었어도 논 이름은 그 집의 브랜드였고 이웃들은 그 이름으로 축하를 했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일은 땅 지주가 아니라 농사짓는 소작농의 발품이다. 개간 황무지 농사 10년이면 옥토가 된다고 했으니 농부의 발품이 닳고 닳아야 기름진 논밭이 된다는 말이고 그것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의 씨앗이었다.
천년고도 쇠락의 치유제는 어설픈 삼류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백성들이 발품으로 모아 놓은 인문력의 집성체다. 농사가 세월이 약이 아니듯 천년고도 번영도 세월이 약이 아니라 최고의 역량이 답이다. 이름값은 하루 아침의 결과물이 아니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