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선비의 가장 큰 특색은 그들이 문화적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보급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서당은 선비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기관이었다.

18세기 이후 동족마을이 많아지자 서당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마을이 한 집안 사람들로 가득 찼기 때문에, 자제들의 교양을 함양하기 위해 서당의 건립이 필수적이었다. 경제적 형편이 조금 넉넉한 평민들도 앞 다투어 마을에 서당을 세웠다.

19세기 후반 전국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크고 작은 서당이 하나씩 있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서당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서당에 대해서도 일제는 간섭과 탄압의 손길을 강화했다. 그런데도 1920년대까지는 제법 많은 서당이 건재했다.

1927년 청주 지방의 예를 들어보겠다. 당시 청주에는 총 202개의 서당이 운영되었다. 그 이듬해인 1928년, 청주군은 18개 면에 355개 마을이 있었다. 총 인구는 16만 2402명이었다. 한국인이 15만 8724명, 일본인이 3434명이었다. 중국인을 비롯한 기타 외국인도 약간 명이 있었다. 주목할 점은, 355개 마을에 202곳의 서당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정상철 편역, 『1929년도(소화 4년) 4월 충청북도 청주군 군세 일반』, 충북발전연구원, 2015).

청주의 서당 중에는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신식 서당이 7개소, 한문만 가르치는 재래식 서당이 195곳이었다. 신식 서당에 다니는 학동은 총 118명으로, 여학생이 2명, 남학생이 116명이었다. 훈장은 8명이었다. 연간 학비는 학동 1인당 8원 78전이었다. 재래식 서당의 학동은 총 1432명으로 모두 남학생이었다.

훈장은 195명으로 서당 수와 일치했다. 학비는 1인당 10원 39전으로, 신식 서당보다 약간 비싼 편이었다(정상철, 『충청북도요람』, 충청북도, 1996).

19~20세기 서당의 시설은 열악했다. 초가집에 방 두 칸 정도의 규모가 일반적이었다. 한 칸은 훈장이 사용하고, 나머지 한 칸은 강의실이었다. 학동들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개인 책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규모가 더욱 초라한 서당도 적지 않았다. 즉, 개인집의 사랑채에 서산대와 글판만 갖춘 서당이었다. 초가집의 사랑방을 빌려 서당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이항재, 「충남지역 서당교육에 대한 연구(Ⅰ)」, 『교육사학연구』 18집, 1996, 164쪽).

하지만 전국의 모든 서당이 규모도 영세하고, 재정도 부실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이후 각지의 명족들은 경쟁적으로 서당을 지었다. 그중에는 규모가 번듯하고, 장서도 넉넉히 갖춘 서당도 많았다. 조선 후기 서당의 기능과 규모를 통틀어서 말하기는 곤란하다. 관련된 통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곳곳에 서당이 들어섬에 따라 선비 집안의 청소년뿐만 아니라 중류층의 청소년들도 초보적인 교육 혜택을 골고루 입었다는 점이다. 성리학적 지식은 더 이상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전국의 여러 서당들 가운데서도 특히 내 관심을 끈 서당이 있다. 대구의 농연서당(聾淵書堂)이다.

1766년(영조 42), 영남의 큰선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농연서당의 유래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 「농연서당기(聾淵書堂記)」에 따르면, 17세기 중반에 최씨 집안 조상인 최동집(崔東㠎)이 서당을 세웠다고 한다.

최동집은 효종(봉림대군)의 잠저 시절 스승으로서, 1640년(인조 18)에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향리로 물러나 강학(講學)에 힘썼다. 당시 사람들은 최동집을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렀다.

그 뒤 세월이 흐르자 그 서당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1754년(영조 30) 최동집의 5대손 최흥원(崔興遠)이 “(서당을) 중건하기 위해 여러 친척들과 힘을 모아, 옛터를 닦아서 작은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농연서당이다.

서당은 모두 세 칸이었다. 동쪽 두 칸은 (공부하는) 방으로 만들어 ‘세심재(洗心齋)’, 서쪽 한 칸은 마루를 놓아 ‘탁청헌(濯淸軒)’이라 불렀다. 그 뒤편에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절간의 승방처럼 따로 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건물 전체를 농연서당이라고 불렀다.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화단을 꾸며 국화를 심었다. 매화, 대나무, 모란, 해당화와 여러 가지 기이한 화초도 심었다.

이상정은 농연서당을 재건한 최흥원과 평소 친밀한 사이였다. 이상정은 최씨 일가의 자제들이 장차 이 서당에서 ‘명성(明誠)’ 공부에 힘써, ‘지행(知行)’이 모두 진보하기를 기원했다. 그들의 존양(存養)과 성찰(省察) 공부가 내실을 다지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명성’인데, 본래는 『중용』에 나오는 것이었다. “밝으면 성실해진다(明則誠)”는 뜻이다. 조선에서는 정여창이 강조한 개념이었다. 최씨의 선조가 정여창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상정이 따로 언급했다. 요컨대 이상정은 농연서당을 통해 최동집의 자손들이 대대로 정여창의 학문적 이상을 계승하고, 성리학의 정수를 체득하기를 바랐다.

이상정의 문집을 살펴보면, 18세기 후반 경상도 각지에 서당 건립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령 영양에는 월록서당(현재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이 들어섰고, 안동에도 모산서당이 자리를 잡았다.

「모산서당기(茅山書堂記)」에서 이상정은 서당 공부의 목적과 방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혀놓았다.

“과거시험 공부는 학자가 정신을 쏟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국가가 인재를 뽑는 방법이 이 한 길뿐이지 않은가. 완급과 선후의 분별을 잘 살펴서 과거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찮은 외부의 욕망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작은 유혹 때문에 소중한 것을 변치 않을 수만 있다면, 과거시험 준비에 매달리더라도 선비들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당이라면 초보적인 문리(文理)나 깨치는 곳쯤으로 지레짐작하기가 쉽다. 그렇게 쉽게 단정할 일은 아니었다. 서당의 수준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모산서당처럼 과거시험 공부를 위주로 한 곳도 있었다. 또 농연서당과 같이 심오한 성리철학의 이치를 탐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당의 학문적 위상과 시설 규모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심지어 당쟁의 전초기지로 역할을 담당한 서당들도 있었다. 홍여하의 산양서당(山陽書堂)과 박세채의 남계서당(南溪書堂)이 그에 해당했다.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각 파는 지방에 정치적 발판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개의 서당이 건립되었으니, 서당은 곧 당파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홍여하의 문집 『목재집(木齋集)』을 읽어 내려가다, 나는 그가 산양서당의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산양서당에 사당을 세우면서 관청에 보낸 글(山陽書堂立社呈文)」이라는 글을 발견했다.

글의 요점은, 관청에서 사당의 건립에 요구되는 노동력을 제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청원이었던 셈인데, 그 일절은 다음과 같았다.

“저희들의 간절한 마을을 헤아리시어, 우리 고을의 한 면(面)을 지정하여 마을마다 각각 정부(丁夫: 일꾼) 몇 명을 보내어 (사당의 건축자재) 운반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음 깊이 감사할 것이며, (사당의) 준공도 빨라질 것입니다. 길이 후세에 칭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당에는 사당의 기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많은 것 같다. 잘못된 생각이다. 산양서당의 경우에서 보듯, 서당 중에는 서원과 체제와 격식이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홍여하의 산양서당은 훗날 근암서원(近嵒書院,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으로 발전했다. 하기야 도산서원도 이황이 생존하던 당시에는 도산서당이었다.

한 마디로 서당은 선비들의 정치적·문화적 활동 거점으로 훗날 서원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성리학을 연구하는 장소이자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이와 달리 규모가 영세한 서당도 많았다. 그런 서당들은 공부를 처음 시작한 청소년들에게 기초 문리를 가르쳐주었고, 선비로서 유념해야 할 제례에 관한 지식을 제공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다종다양한 서당들이 전국 어디에나 있었다.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 성황리에 운영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서구의 여러 근대국가들과 달리, 조선왕조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국가 재정이 너무도 빈약했다. 대신에 민간이 주도하는 서당이 마을마다 운영되었다.

그 덕분에 대다수 남성은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제공받았다. 조선의 서당교육은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결코 못하지 않았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조선의 교육 여건은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당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저력을 증명했다. 그것은 성리학 이념을 모든 계층에 확산시킨 강력한 수단이었다.

전국 어디에나 많은 서당이 있었기에, 조선 사회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는 성리학 국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통속소설들도 충, 효, 열의 도덕적 가치를 선양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무속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온 서사무가조차도 성리학적 가치에 위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당을 통한 고급문화의 경험은 훗날의 교육열로 다시 꽃을 피웠다.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한국 사회는 사상 최고의 교육열을 보였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교육 열기가 현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견인한 주된 동력이었다. 조선 후기에 퍼졌던 서당 교육의 열기가 되살아나, 한국의 근대화를 선도한 것이다.

백승종 교수
백승종 교수

아쉬운 점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입시지옥을 낳았고, 한국인을 무한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 조선시대의 서당은 경쟁과 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조화로운 삶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컸다. 사회적 통합과 도덕적 삶의 가치를 앙양하는 등, 서당은 교육의 사회문화적 순기능을 강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현대 한국의 교육제도는 서당의 역사적 전통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언급할 겨를은 없다. 단지 그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하는 데 그친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첨언 :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학습공동체가 필요한 오늘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를 옥죄는 적폐의 구덩이를 탈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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