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상의 전북 문화 이야기(17)

호남은 한국 실학의 못자리다. 실학의 씨를 뿌린 비조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쓰며 공부한 곳이 부안이다.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는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 등 방대한 저술을 한 곳도 호남이다. 고창의 이재 황윤석(黃胤錫1729~1791) , 순창의 여암 신경준, 장흥의 존재 위백규를 호남3대실학자 또는 호남3천재, 호남3걸이라 꼽았다. 실학이 싹트고 꽃피고 열매맺은 본고장이 호남인데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에서 기호학파 등은 자주 언급하면서도 정작 호남파라는 용어도 없었을만큼 홀대받았다.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호남출신 석학들이 학문마당에서까지 저평가된 것이 안타깝기만 한 현실이다.
조선시대 생활사를 복원할 타임캡슐 백과사전이며 한국사에서 개인저술로 가장 방대한 530만자로 추정되는 <이재난고> 라는 구슬이 진흙속에 묻혀 있었다. 그 저자인 호남의 걸출한 대학자 황윤석도 그간 햇빛을 보지 못한 날이 길었다. 다행히도 8대종손 황병무 국방대학교 명예교수가 희사한 퇴직금 2억원을 종잣돈으로 전북대학교가 2007년 '이재연구소' 를 개설하여 체계적인 연구작업을 시작하였다.
종손 황병무 교수는 흩어진 이재난고 자료와 목판본을 모으고 소유권을 확보하여, 2021년 고향인 고창군 박물관에 기증 기탁하였다. 후손, 전북대, 전북도, 고창군이 손잡고 울력하여 학술대회, 번역작업, 국가보물지정,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등재 등을 본격 추진해왔다. 마침내 첫 단추로 지난주에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재되어 <이재난고>가 조선시대 과학기술사의 핵심사료임이 공인되었다. 후손들과 고창군 등 관계기관의 노력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2백여년 만에 시절인연을 만난 호남의 대박물학자 황윤석과 그의 백과사전인 <이재난고>가 다시 국가공인의 햇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봉황의 경륜'을 가졌으나 날지 못한 '비운의 황윤석'

백과전서파 실학자인 이재 황윤석은 전라도 흥덕현 구수동(현재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평해황씨 집안에서 출생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에 활약한 대박물학자다. 영조는 이재를 만나보고 '박학하고 질실한 선비(博學質實)' , 스승인 석실서원 미호 김원행은 '호남의 참 호걸지사', 전라감사를 두번이나 역임하고 황윤석 묘지명을 쓴 이서구는 '남녘의 걸출한 선비', 서명응은 '박학지사'라고 평가했을만큼 박학하고 소박하며 옹골찬 학자였다.
황윤석은 "군자는 한가지라도 모른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를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 다양한 학문을 익히고 기록하기를 즐겼다.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어학, 역학, 수학, 음악 등 철학적 연구를 뛰어넘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 등 분야를 망라한 책벌레, 공부벌레였다. 이재의 증조부 황세기가 우암 송시열을 사숙하였고, 종조부 황재중은 기정익 문하에서 수학한 뒤에 강한 문필봉인 소요산 거북바위 터에 구암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황윤석은 관직 진출과 학문배경의 인맥형성을 위해 노론의 대표적 서원인 남양주 석실서원의 안동김씨 명문가 학자인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삼아 인맥을 넓힌다. 황윤석의 뛰어난 학문에도 불구하고, 호남출신, 배경미약의 한계로 과거시험은 거듭 실패하였다. 주변의 추천으로 장릉참봉을 시작으로 모처럼 나간 목천현감, 전의현감 자리도 당쟁갈등의 희생양으로 파직되는 등 경륜을 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황윤석은 호남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호남 스스로 큰 인물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당시 정치사회 여건상 그의 능력을 마음껏 펴보지도 못한 비운의 천재였다. 필자는 고창출신 대학자를 몰랐다는 자괴감에서 이재연구소에 동참했고, 황윤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호남3천재의 풍수사상을 연구한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책 서문에서 필자는 "당대에는 차별의 땅에서 사시며 큰 벼슬을 못하여 경륜천하의 기회가 없었지만, 위대한 사상과 천지인을 달통한 학문적 업적으로 우리의 사표가 되어, 역사속에 영원히 사실 위대한 호남의 3천재 세 분의 큰 스승께 못갖춘 이 책을 바친다 "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조선생활사의 보물창고 '이재난고'

황윤석의 삶과 학문이 녹아있는 기본자료인 <이재난고>는 그가 10세부터 63세로 죽기 3일전까지 53년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비망록, 연구노트, 생활일기이다. 시간순으로 기록한 연대기적 사료지만 황윤석 스스로 일기라고 하지 않고 난고라고 부른 것은 통상의 일기가 아닌 특별한 자료라는 뜻이리라. 황윤석의 박학과 호학의 태도가 잘 반영된 난고에는 매일의 행적, 생각, 시, 주역점,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인사, 음악, 수학, 서양과학 등 실로 다양한 지식정보로 가득하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관찬사료의 한계를 메꾸어줄 귀한 자료가 많아서 흔히 조선시대의 타임캡슐이라 평가된다.
예를 들면, 고창 선운사의 녹차로 약차제조법과 다도구를 그린 '부풍향차보' 기록은 가장 오래된 차문화 관련자료이다. 조선 수능생 문화와 배달의 민족임을 알 수 있는, 과거시험 본 뒤에 냉면을 주문배달시킨 기사, 고창 석정온천 개발의 실마리가 된 온수동 지명도 나온다. 우리 꽃 맨드라미의 어원이 범어 만다라에서 왔다는 어원연구 같은 재미있는 자료가 넘친다. 일찍이 <이재난고>의 가치를 알아챈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4년부터 10년 동안 필사본 초서를 해독 활자화하여 전9책을 발간하였다.

이로 인해 초서자료의 한계를 넘어 자료접근이 용이해져서 많은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고창군과 전북도의 소액지원으로 이재연구소가 한글 번역작업을 근근히 하고 있으나, 국비지원으로 조속히 번역작업을 완료하는 일이 시급하다. 박사학위 수백개가 나올 사료가 한문의 벽에 갇혀있다. 나아가 추진중인 국가문화재 보물지정도 조속히 이루어져서 무진장한 지식의 보고 이재난고가 국가적 지원으로 제대로 햇빛을 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유현준 건축가의 걸작 공공건축으로 되살아나는 '황윤석 실학도서관'

만시지탄이지만 후손과 고창군 등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비운의 대학자 황윤석과 그의 보물일기 <이재난고>가 햇빛을 보기 시작하여 퍽이나 다행이다. 나아가 고창군은 새로 건립하는 군립도서관을 군민의견 수렴과 지명위원회 전문가들 심의로 '황윤석 실학도서관'으로 걸맞게 명명하였다. 가장 많은 책을 읽고 가장 많은 책을 쓴 호학의 상징 책벌레, 고창출신 호남 3대실학자 황윤석이란 이름은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것이다.

또한 이왕 도서관을 지을 바에는 미래의 문화재가 될 화제의 공공건축으로 지역살리기의 거점이 되도록 설계하였다. 공공건축을 활용한 도시재생을 기획하는 최고의 건축가인 홍익대 유현준 교수 생애의 야심작품이다. 한국 최고의 건축 문화유산인 종묘에서 영감을 얻어 큰 나무아래서 책을 읽는 느낌이 나도록 전통과 현대미, 실용성이 조화되게 친환경 설계된 황윤석실학도서관은 문화예술계와 건축계의 화제의 공공건축이다.
내년에 이 도서관이 개관하면 인스타성지가 될 것이고 먼 훗날 이 시대의 문화재가 될 것이다. 이 나라 최고의 책벌레, 공부벌레, 죽기 3일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은 의지의 고창사람 황윤석을 본받아서, 황윤석을 계승하고 능가할 걸출한 인재들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글·사진=유기상(문학박사·전 고창군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