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 세상은 몹시 어지러워졌다. 군정이 문란해지고, 재력은 쇠진하였으며, 매년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들끓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 백성들을 북쪽 땅으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어떤 변란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 대비책을 세워 앞일을 헤쳐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정여립은, 우선 자기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차별체제에 도전하고 평등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기초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전주․태인, 금구 등 인근 읍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이나 반상귀천․남녀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만들고,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떄 정여립은 글 읽기에 힘쓰면서 한편으로는 무술을 연마하여 왕조 전복을 준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미륵신앙의 요람 금산사 일대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단순히 고향이나 처가집이 가까워서가 아니고 그가 꿈꾸었고 건설하고자 했던 대동세상의 고향으로서 가장 합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당시, 해서(海西)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돌았다.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서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는 수륙(水陸)의 조례와 일족, 이웃의 오열과 도피자 색출 등을 모두 감면할 것이고, 공․사천과 서얼(庶孼)을 금고(禁錮)하는 법을 모두 혁제(革除)할 것이니, 이로부터 국가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하였다. 이 말은 곧 백제 멸망 이후 금산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에 거는 민중들의 염원이나 다름 없었다.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원들은 매달 보름(十五)날 한 번씩 회합하여 글도 배우고 활쏘기, 말 타는 법, 칼과 창 쓰는 법도 배웠다. 사람은 글만 배워도 안 되며 무술도 알아야 한다고 하여, 매월 모일 때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활 쏘기 시합을 하여 무술을 연마하였던 것이다. 이때 정여립의 본가에서는 주육과 음식을 많이 준비하여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 불교의 경전《유마경》維摩經 : 깨끗한, 물들지 않은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유마는 이경의 주인공인데 한 번의 침묵으로 불이 법문에 들어가는 길을 보여주었다고 함.)에 나오는 “밥에 평등 할 때 법도 평등하다”는 말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 부근의 잘 사는 사람들도 정여립이 조력을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유성룡이 술회하였던 것처럼 정여립은 멀리서 조정까지 움직일 만큼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죽도 선생이라고 하면 부근의 어린 아이들까지 한푼 두푼 기부할 정도였으며, 재산이 많은 한 과부가 전 재산을 팔아서 바쳤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들은 전부터 정여립이 비범한 인물인 줄 알았었고 또 어수선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에 정여립의 청탁이 가기만 하면 곡식과 돈, 그 밖의 각종 물자를 바리바리 실어서 보내주었다.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정여립을 평하기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엎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 나와 집에 있으면서 자중하는 체 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에서는 달려가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정여립의 학문의 깊이 역시 선조 39년(1606) 10월 오익창(吳益昌)이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당당한 성명의 조정에 감히 임금의 자리를 넘겨다보는 궤를 낸 것이 이 역적보다 더 심함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 이름을 도둑질하던 초두에 학문을 가탁하고 박학과 변론으로 꾸려나가 성명지학을 고담준론 하고 도의를 강론하여 온 세상을 속이니,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 번 보는 것으로서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여 정여립의 학문적 명성이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주부윤이었던 남언경 또한 당파가 달랐음에도 “정공(鄭公)은 학문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다른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하며 주자(朱子)에 비기기도 하였으며, 정개청은 18살이나 나이가 적은 정여립에게 보낸 글 가운데 “도(道)를 높고 밝게 봄이 당세의 오직 존형(尊兄)뿐이라” 하였다.
이발 역시 정여립을 당시 “제일인물”이라 하였고,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하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하여 대동계원들 뿐만이 아니라 호남의 지식인들이 정여립의 집에 모여 들었고, 또한 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책도 읽고 무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정여립은 그 시대의 스승이었다. 사서오경은 물론이고 글로 적은 것이라면 무엇을 갖다 대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희미한 법이 없고 불을 보듯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정여립은 이 무렵 대동계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큰 적자라도 학문과 예법만 숭상할 줄 알았지 육예(六藝-육경을 말하는 것이 원칙인데, 주례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 하였다)를 다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제 내가 육예를 가르쳐주겠다.”

이것만 보아도 정여립이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성리학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여립에 대한 칭송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여기저기서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대동계에는 신분의 제한이 없었고, 상민이나 종이나 중, 사당, 광대, 점쟁이, 풍수, 무당 할 것 없이 별별 계층의 인물들이 다 들어있었다. 정여립은 능란한 말솜씨와 의젓하고 늠름한 태도로 가르쳤으므로 누구나 존경의 마음을 품었다. 또한 그들 중에 근심되는 일이 있거나 자기 혼자서 해결 못할 일이 있으면 힘써 도와주기도 하여 그들의 인심을 한 손에 쥐었다. -신정일의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중에서
정여립이 살았던 그 당시와는 다르게 금평저수지가 푸른 물결로 넘실거리며, 눈덮힌 제비산 너머 모악산은 무거운 송신탑을 머리에 쓰고 서 있으니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에 거는 민중들의 염원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